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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악이씨(安岳李氏)

by 유리의 세상 2008. 10. 29.

안악이씨(安岳李氏)


 안악이씨(安岳李氏)는 고려 공민왕 때 검교문하대승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견(李堅)을 시조로 받든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고려 충정왕(忠定王) 원년에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에 임명되고  이어 충정왕 2년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냈다.


 특히 이견은 1360년(고려 공민왕9) 홍건적이 의주(義州), 정주(定州), 서경(西京) 등지에 침입했을 때 안주도만호(安州都萬戶) 안우(安祐), 상만호(上萬戶), 이방실(李芳實),  부만호, 김어진(金於珍) 등과 함께 상장군으로 출전하여 크게 공을 세웠고, 함종(咸從) 전투에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망을 떨쳤다.


 그 후 이견의 아들 정림(挺林)이 황해도(黃海道) 안악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세거  하면서 가세를 일으켰다.시조 이견의 손자이자 정림의 아들인 의만(義萬)이 고려말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임명되었으나 화를 입고 경상도 창원(昌原) 지방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쳤으므로 후손들이 창원, 의령(意寧), 단성(丹城), 함안(咸安)  등지에 집단세거하게 되었다.

 

4세 흥부(興富)는 우왕(禑王) 때 경상도 지병마사에  임명되어 밀성(密城  : 지금의 밀양)  지역에 내침한 왜구를 격퇴시켜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승격되었고 그의 동생 흥인(興仁)은 진주만호(晋州萬戶)에 재임 중에 내침한 왜구를 격파하고 전함을 포획하여 왕으로  부터 백미 20석을 하사받았으나 「이것이 어찌 나 혼자만의 공이겠느가」하고는  그 쌀로  술을 빚어 병사에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흥인의 손자인  계을(桂乙)은 고려말에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있다가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망국이 한을 품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의 아들 안악 감무(安岳監務) 신(晨)이 두문동산 기슭에 아버지를 장사지낸뒤  그 묘앞에서 따라 자결하여 부자 감무(安岳監務) 신(晨)이 두문동산 기슭에 아버지를 장사지낸뒤  그 묘앞에서 따라 자결하여 부자 충절로 유명했다.

 

그 후 조선 세종(世宗) 때 와서 부자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나라에서 이신을 안악군(安岳君)으로 추봉하고 그 때까지 양산이씨(楊山李氏)로  써오던  관향을 안악이씨로 고치게 하였다. 신의 아들 구관(九寬)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벼슬길을 포기하고 두문동에서  농사를 짓다가 임금의 명을 거절하지 못해 안악군수, 예조참판 등을  지낸뒤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佛頂面 芝蔣里)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그 지방에  살게 되었다.

 

그외 예조판서를 지낸 이호(李灝)와 돈령부 도정 이면, 회원부사(檜原府使) 이개(李愷), 거창현감(居昌縣監)  이맹분(李孟 ) 등이 가문을 대표했고, 충주 목사로 있다가  이시애 발나을 편정하는데 공을 세웠던 이평(李 枰)은 안악군에 봉군되고 병조참판에 올랐으며, 이잠(李潛)은 임진왜란 때 옥천(沃川)에서 왜적을 격퇴시키고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장군과  함께 진주성(晋州城) 전투에 참전했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충절의 전통을 이었고, 한편 이운장(李雲長)은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의 막하에서 현풍(玄風), 창녕(昌寧), 함안(咸安)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낙동강(洛東江)  정암(鼎岩) 전투에서 전사하여, 충무공 이순신 막하에서  무공을 세워 공신에 책록되고  병조참의에 추증된 이득종............??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 조사결과 안악이씨는 남한에 총 1,980가구, 7,9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 안악사촌계
글쓴이 : 이상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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