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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라 & へ山行
Life & Culture/Letters

Re:케네디와 링컨 대통령

by 유리의 세상 2009. 1. 8.

 

 

 

대통령케네디와링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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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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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네디

 

 

케네디와 링컨 어떻게 마음을 사로잡는 대통령이 되었나

케네디 평전 1,2
권력의 조건
강인선 논설위원
insun@chosun.com
김창균 기자
ck-kim@chosun.com   
 


미국에서 여론조사를 하면 존 F 케네디는 언제나 가장 위대한 대통령 5명 안에 든다. 워싱턴, 링컨, 루스벨트, 레이건과 함께 미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다. 그런데 케네디에겐 다른 최고 대통령들에 견줄 만한 업적이 별로 없다.

 

케네디의 대통령 성적표는 화려하지 않다. 국내적으로 획기적인 입법성과는 없었다. 흑인인권 신장에도 과감하지 못했다. 외교 분야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대처와 핵실험 금지조약 성사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쿠바 문제는 결말을 짓지 못했고 베트남 내전에 더 깊이 관여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학자들 눈엔 그다지 출중할 게 없는 평범한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가장 과대평가된 저명인사’라고도 불린다.

 

대중의 눈은 다르다. 케네디에 관한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한다. 대통령에 관한 온갖 소문, 암살 배후의 음모론, 부인 재키의 패션까지도 관심사다. 그래서 더 이상 파헤칠 것도 없는 케네디에 관한 책은 나오고 또 나와도 늘 화제다.

 

역사학자 로버트 댈럭(Robert Dallek)이 쓴 1400쪽짜리 ‘케네디 평전’은 당시 정치·사회·외교 상황이라는 역사적, 세계적 맥락 속의 케네디를 그렸다. 전반부는 대통령 당선 이전, 후반부는 이후로 구성돼 있다.

 

요즘 같은 대선 분위기라면 케네디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병적일 정도로 복잡한 여자관계와 난잡한 약물목용은 심각한 문제였다. 척추질환, 결장염, 에디슨병, 전립선염 등을 앓은 진료기록은 비밀에 부쳐졌고, 재키와의 결혼생활은 행복한 부부로 포장됐다. 케네디는 재키의 무분별한 사치에 고통받았다. 대통령 월급 대부분을 옷값으로 지불해야 할 정도였다.

 

케네디는 밝고 건강하고 희망적인 지도자상을 심었다. 케네디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때, 공화당에서조차 “우리 당 사람이면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케네디는 1960년 대선에서 닉슨에 압승할 것으로 확신했지만 가까스로 이겼다. 약 6900만명이 참가한 선거에서 11만표 앞섰을 뿐이었다.

 

이 씁쓸한 승리가 약이 됐다. 케네디는 취임을 앞두고 치밀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해갔다. 선거 나흘 후에 닉슨을 만나러 갔다. 정쟁을 초월하는 통 큰 정치인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버드 행정부라 불릴 정도로 똑똑한 인재들을 긁어 모았다. 참신한 정책 아이디어와 구호는 모두 이들 머리에서 나왔다.

 

언론 활용에도 귀재였다. 각료 후보를 발탁할 때마다 기자회견을 열어 뉴스를 만들었다. 전문가집단에게 사안별로 특별대책을 만들게 한 후 보도자료로 활용했다. 국민들은 차기 행정부가 “정력적으로 달라붙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취임연설은 당선 직후부터 준비했다. 20세기 최고 연설이란 평을 듣겠다는 각오로 외교에 초점을 맞춘 간결한 연설문을 준비해 달달 외웠다.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기 전에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십시오”란 명연설은 그렇게 나왔다.

 

취임 후 첫 100일 동안 가장 큰 걱정거리는 경제였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눈에 띄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케네디는 백악관 기자회견 생중계로 승부를 걸었다. 참모들은 위험하다고 뜯어말렸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자회견은 전 국민이 즐기는 호화 특급 쇼 프로가 됐고, 케네디는 ‘신뢰할 만한 지도자’란 인상을 주는 데 성공했다.

 

1963년 11월22일 케네디는 재선유세를 위해 달라스에 갔다가 오스왈드의 총탄에 쓰러졌다. 미국인들은 ‘더 나은 미래를 박탈당한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케네디가 위태로운 국제정세를 호전시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케네디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미국이 더 큰 미래와 인류를 위해 일할 것이란 자부심을 주었다. 젊고 참신한 대통령으로서 믿을만한 지도자란 확신도 주었다. 기초공사를 다 해놓고 기대가 한창 부풀었을 즈음에 케네디가 암살당했다.

 

케네디가 남기고 간 이런 아쉬움 때문에 미국인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케네디 신화에 집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사회상을 복잡하게 설명해주지만, 이 평전은 결국 케네디 리더십의 핵심은 ‘개인적인 매력’임을 강조한다. 그것이 케네디가 시대를 넘어 대중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이유라는 것이다. 원제 ‘An Finished Life’


 
1860년 5월 18일은 미국 북부의 신생 정당인 공화당이 11월 대선에 내보낼 후보를 결정하는 날이었다. 선두주자는 뉴욕 상원의원 윌리엄 슈어드였다. 오하이오 주지사인 새먼 체이스도 만만치 않은 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존경 받는 원로로서 주변의 강권에 떠밀리다시피 출마한 미주리주의 에드워드 베이츠 판사도 다크호스로 꼽혔다. 그러나 전당대회의 막이 열리자 트로이카 후보들이 각자 비토세력의 저항에 부딛치며 예상치 못했던 시나리오가 전개됐다. 세 차례 투표 끝에 과반을 2.5표차로 넘긴 당선자는 정치권과 언론이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일리노이주의 에이브라함 링컨 변호사였다.

 

퓰리처상 수상자 도리스 컨스 굿윈(Doris Kearns Goodwin)이 집필한 ‘권력의 조건’은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과 그의 라이벌 슈워드, 체이스, 베이츠 등 네 사람의 삶을 인생 단계별로 옴니버스 형식으로 추적한다. 유년기, 학창시절, 정치입문, 정계활동에 이르기까지 슈워드, 체이스, 베이츠는 레드 카펫 위를 걸었다.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 당시로선 특권층만 가능했던 대학교육을 받았고 잘 나가는 변호사 시절을 거쳐 정계로 뛰어들었다. 정치권에서도 상원의원, 주지사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반면 링컨은 자신의 이름을 겨우 쓸 줄 아는 일자무식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정계에서는 하원에서 한번 당선돼 별 볼일 없는 의정 활동을 했고, 상원 선거에선 두 번 연속 낙선했다.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던 네 개의 운명은 1860년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서 극적으로 교차하며 ‘인생역전’이 이뤄졌다.

 

대통령에 당선된 링컨은 공화당 공천권을 다퉜던 세 명의 정적(政敵)을 내각에 끌어 들였다. 슈워드는 국무장관, 체이스는 재무장관, 베이츠는 법무장관에 각각 임명됐다. 대통령보다 더 유명하고, 더 많은 교육을 받고, 풍부한 공직경험을 지닌 스타들로 내각을 꾸미는 것은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세 사람은 모두 링컨을 지독하게 운이 좋았지만, 경험 없고, 무식한 촌뜨기라고 생각했다. 링컨은 그저 얼굴 마담일 뿐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링컨의 큰 그릇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16대 대통령 감으로 가장 유력하게 꼽혔던 슈워드 국무장관이었다. 그는 장관이 된지 몇 달 만에 링컨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조언자가 됐다. 심지어 슈워드의 가족마저 링컨의 확고한 지지세력으로 변했다. 슈워드의 아내는 일기에 “그(링컨)가 정말 마음에 든다”고 적었다. 슈워드의 아들도 일기에서 “대통령과 왕들은 자기 주장에서 흠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중대한 시기, 미 연방에는 다행히도 논리적인 사고력과 따뜻한 가슴을 모두 갖춘 대통령이 있다”고 썼다.

 

베이츠 법무장관의 링컨에 대한 평가는 ‘착하지만 무능한 행정가’에서 ‘완벽에 가까운 지도자’로 바뀌었다. 대통령직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해 오랫동안 고뇌하던 체이스 재무장관도 결국 “링컨은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링컨 대통령은 초대 전쟁장관이 비리 의혹에 휩싸이자 후임으로 에드윈 스탠턴을 임명했다. 스탠턴은 변호사 시절 링컨과 함께 사건을 맡았을 때 링컨을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긴팔 원숭이”라고 경멸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링컨은 그 사건에서 스탠턴이 보여줬던 논리적인 주장과 열정적인 변론을 기억하고 내각에 끌어 들였다. 저자는 링컨이 하나 하나 인재를 품어 안는 과정을 소개하며 ‘진정한 권력의 조건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는 결론을 향해 독자를 이끌고 간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주자 시절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라는 책을 직접 펴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 링컨이라는 말도 여러 차례 했었다. 노 대통령도 링컨처럼 가난한 어린 시절을 거쳐 고학을 통해 변호사가 됐으며, 한차례 국회의원이 된 후 여러차례 낙선한 경험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상당수 사람들이 예상 못했던 대통령 당선’이라는 지점까지는 링컨과의 공통점을 이어갔다. 그러나 링컨이 ‘코드와 관계없이 능력위주로 초대 내각을 구성’한 대목부터 길이 갈리기 시작했다. 링컨은 남북으로 두 동강난 미 연방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통합의 리더십으로 국민들 머리 속에 자리 잡았다. 800페이지가 넘는 ‘권력의 조건’ 곳곳에서 ‘노무현이 만나지 못했던 링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원제 ‘Team of Riv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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