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로에서는 220여석 규모의 소극장 공연 한 편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주인공은 지난 11일부터 질러홀에서 오픈런 중인 ‘드로잉쇼’. 완성된 그림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즐길 수 있게 한다는 참신한 발상과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낸 독특한 화법이 성별과 연령을 초월해 관객을 사로잡은 것이다.
공연 중에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을 경매로 팔아 전쟁고아 등 세계 각지의 가난한 어린이를 위해 기부하는 행사는 150만원의 낙찰가를 기록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쇼의 줄거리는 다소 만화적이다. 외계의 드로잉월드에서 비행 박스를 타고 날아온 5명의 ‘더 룩(The Look)’ 종족이 말 대신 그림(드로잉)으로 지구인들과 소통한다는 것.
그런데 이 드로잉이 ‘진짜배기’다. 외계 종족 ‘더 룩’이 강한 비트의 음악에 맞춰 90여분간 10여점의 미술 작품을 쏟아내는데, 초고속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과정도 묘기에 가깝지만 사용하는 재료와 기법도 탄성을 자아낸다.
그림 한 점을 완성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보통 1~2분 내외, 높이 2m의 대형 화폭에 자크 루이 다비드의 대작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그리는 데에 단 6분이 소요된다.
이들은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물감을 튀기기도 하고, 특수 개발한 안료를 이용해 산수화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게 하거나, 남대문 스케치가 불타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어릴 적 미술 시간에 해봤던 마블링 같은 기법도 전혀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다.
공연을 보고 나면 가장 먼저 궁금해지는 것은 ‘누가, 어떻게 이 쇼를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서른 살 무렵 ‘드로잉쇼’를 구상한 뒤 불혹이 된 지금까지 젊은 날을 바쳐 작품을 완성한 예술감독 김진규 씨를 만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그의 지난 10년은 말 그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였고, 이는 고스란히 자신의 ‘쇼’에 반영돼 있었다.
▶해답 없는 질문이 창조를 낳다
“학창 시절 미술을 전공할 때부터 이해가 안 됐어요.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훨씬 더 흥미로운데, 왜 완성한 다음에 전시장에 걸어놓고 감상해야 하는 건지…. 고가의 미술 작품을 떠올리며 그림을 돈 많은 이들의 전유물로 여길 때도 안타까웠죠. 그림은 특별한 사람이 특별하게 즐기는 게 아닌데 말이죠.”
김씨는 98년께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림 그리는 자신에게 “쇼한다~”고 놀린 친구의 말에 번개같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그림 그리는 과정을 보여주면 그게 바로 쇼가 되겠구나.’
하지만 모델은커녕 참고할 만한 사례조차 전무(全無)한 상태에서 새롭게 뭔가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드로잉쇼’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변인들에게 설명해도 실제로 눈앞에 보여주기 전까지는 이해시키기 어려웠다.
그는 손바닥만 한 작업실을 차려놓고 그 안에서 별의별 실험을 다했다. 조명으로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연기를 피운 뒤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르며 모양을 빚어보기도 했다. 도화지에 과일을 문질러 그림을 그리다가 벌레가 몰려들어 망치기도 하고, 입으로 물감을 뿜다가 물감을 삼킨 것도 수차례였다.
국내에서 판매되지 않는 특수 재료를 사용하다 보니 종이 값만 한 달에 수백만원, 500㎖ 물감 한 통을 사는 데 200만원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개발한 노하우는 이제 그의 일급 기밀이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재산이 됐다.
▶화폭의 뒷면, 남모르는 고난과 기쁨
김씨는 대학원 졸업 후 몇몇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다가 곧바로 대학교수로 임용되는 등 겉보기에 탄탄대로를 달렸지만, 돈을 버는 대로 드로잉쇼 개발에 쏟아붓다 보니 늘 생활고에 시달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인지라, 전세에서 월세로 가세는 점점 기울어갔다. 가족도 심각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급기야 2006년 교수직까지 버리고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가 심장마비로 쓰러지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곁을 떠났다.
“전부 잃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간신히 건강을 회복하고 나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겠더군요. 그때 신앙도 갖게 됐어요.”
김씨는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드로잉쇼’를 내놓지 않겠다던 고집을 꺾고 그간의 작업 내용을 공연 형태로 정리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또 한 번 “미쳤다”고 했다.
새로운 인생에 눈을 뜨게 해준 기독교에 대한 고마움으로 공연 제목을 ‘크라이스트 드로잉’이라고 붙였기 때문. 공연 내용도 예수의 초상화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등 종교화를 그리는 것으로 바꿨다.
어렵사리 모은 투자자들은 ‘망할 게 뻔하다’며 즉시 돈을 회수했고, 함께 작업하던 멤버들도 여럿 떠났다.
그래도 2007년 6월, 그는 고집스럽게 첫 번째 드로잉쇼를 대학로에 올렸다. 끝까지 자신의 손을 놓지 않은 스태프 4명, 배우 1명과 함께였다. 예산이 부족해 팸플릿을 찍는 것은 꿈도 못 꿨고, 간신히 포스터 몇 장만 거리에 붙였다.
그런데 공연 시작 후 열흘을 넘어가면서부터 기적처럼 매진이 계속됐다. 예상과 달리 관객도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인이 대다수였다. 그는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인사하던 날,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뜻밖의 성공 덕에 발등에 떨어진 큰 빚도 갚을 수 있게 됐고, 다음 공연에 대한 희망도 품게 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내친김에 전용관을 마련하기로 했다. 극장 대관은 너무 비싸 엄두를 못 내고, 사당동 먹자골목의 허름한 상가 한쪽을 빌려 무대와 객석을 직접 만들었다. 70여석 규모의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작품을 개발하는 데까지 들인 돈은 총 3000여만원.
극장을 찾아왔다가 “이런 데서 뭘 한다는 거냐”고 실망했던 관객은 공연이 끝날 때면 열렬한 박수를 쏟아냈고, 한 달간의 공연은 매회 만원이었다.
“세상에 대한 핑곗거리를 찾지 않아도 진짜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죠.”
그러나 돈이 모자라 방음시설을 못한 게 화근이었다. 공연 도중 옆 골목에 계란 장수가 지나가고 위층 피아노학원에서 ‘띵똥’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난감해지기 일쑤였다. 결국 전용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그 무렵, 지금의 파트너가 된 공연기획사 펜타토닉의 정규철 대표를 만났다. 2007년 말 SBS TV 프로그램 ‘스타킹’에 출연한 김씨를 본 정 대표가 “함께 제작해 보자”고 제안한 것.
결국 꿈에 그리던 전용관을 대학로에 열고, 가장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낸 멤버들과 다시 공연을 시작했다. 그는 지금도 멤버들에 대한 고마움을 얘기할 때면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드로잉쇼’가 그리는 미래
김씨의 꿈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사람들 각자의 가슴에 그림을 그려넣고 싶어요. 아름다움을 세상에 나눠주는 미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미술을 꿈꿉니다.”
또한 그는 대상을 대학로의 관객들에게 국한하지 않고 전국, 더 나아가 세계로의 진출을 꿈꾼다.
“해외 투어를 위한 대형 공연도 구상 중입니다. 드로잉쇼는 새로운 형태의 논버벌 퍼포먼스인 만큼 자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 오디션과 교육 과정을 시스템화하는 것이 과제다.
“꼭 미술을 전공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전공자가 자기 매너리즘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봤고요. 지금 무대에 서는 배우들도 한 명을 빼고는 비전공자거든요. 손놀림이 뛰어나고 끼가 많은 친구라면 환영입니다.”
김소민 기자(som@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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