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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라 & へ山行
Life & Culture/Common Sense

네번째 한일전, 이길 필요 없다

by 유리의 세상 2009. 3. 20.

 

 

 


지겹다. 벌써 네번째다. 20일 오전(한국시간) 벌어지는 한국과 일본의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경기 이야기다. 변태적인 더블 일리미네이션 제도 덕분에 두 팀은 이번 대회에서만 네번째 대결을 벌이게 됐다. 겉보기에는 두 팀 다 대결을 벼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은 한국에 당한 2연패를 갚겠다는 태세고, 한국도 이 기회에 일본에 대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겠다는 입장이다. '조 1위'라는 상징성도 여기에 한 몫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네번째 한일전에서 또 한번 한국이 총력전을 벌여 승리를 거둬야 할까? 자세히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20일의 대결은 이기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천성이 뉴라이트(라고 쓰고 뉴또라이라 읽는다)라 한국의 패배를 원해서가 아니다. 일본이 조 1위가 되길 간절하게 바라서도 아니다. 한국에겐 20일 승부보다 더 중요한 3라운드 결선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 WBC 당시를 떠올려 보자. 그때 한국 대표팀은 두 차례의 일본전에서 연승을 거두고 의기양양한 가운데 4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정작 WBC 우승을 차지한 국가는 한국도 미국도 아닌 엉뚱한 나라, 일본이었다. 해괴한 대회 규정 때문에 한국은 일본에게 2승 1패로 우위를 점하고도 4강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이번 대회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일본과의 네 차례 대결에서 3승 1패로 결선에 오르건 2승 2패로 올라가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4강 진출은 확정된 상태이고, 일본과는 (운명이 허락한다면) 다섯번째 대결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가서 패한다면 이전 네 경기에서의 승패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3승 2패로 우위'라고 주장해도, WBC 우승 타이틀 앞에서는 의미를 잃는다. 자칫하다가는 또 한번 변태적인 제도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데도 굳이 일본을 또 한번 이기는데 힘을 허비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야구에서는 아무리 약팀 대 강팀의 대결이라도 약팀이 몇 번은 이기고 강팀도 몇 차례 정도는 패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한국과 일본처럼 국가대표 진용에 있어서는 대등한 수준에 있는 두 팀이 대결한다면, 그 승패의 차이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과연 한국이 일본과 다섯 차례 붙어서 4승 1패의 압도적인 우위를 구가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등한 두 팀의 대결에서 그처럼 일방적인 승패가 나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보다는 두 팀간의 승패는 3승 2패 정도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게 합리적이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이 당할 1패가 과연 2라운드에서 나오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3라운드 결선에서 나오는 게 좋을까. 답은 분명하다. 한국이 2라운드에서 힘을 뺄 필요가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20일의 대결은 한국에겐 이겨봐야 얻는게 없는 시합이다.


여기에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일본이 결승에 올라온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일본이 4강전에서 패해 다섯번째 대결이 무산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마지막 대결이 될 수도 있는 2라운드 1위 결정전에서 반드시 이겨서 기를 꺾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요지의 반론일 것이다. 물론 그런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건 아니다.


하지만 이번 대회 한국의 목표가 '극일'이 아닌 '우승'이라는 점을 놓고 생각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만일 한국이 20일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면 4강에서는 홈팀인 미국을 만나게 된다. 반면 전력을 최대한 아낀 결과 패한다면 베네수엘라와 결승을 놓고 다투게 된다. 과연 어느 쪽을 상대하는게 유리할까?


베네수엘라가 막강 타선을 보유한 팀이라는 점을 들어 미국과 상대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베네수엘라는 강력한 화력 외에는 여러가지 부면에서 헛점이 많은 팀이다. 펠릭스 에르난데스(시애틀)를 제외하면 한국 타선을 제압할 만한 투수도 눈에 띄지 않는다(다행히 킹 펠릭스는 이미 푸에르토리코전에서 86개의 공을 던지며 소모됐다). 게다가 베네수엘라를 이기면 하루를 쉰 뒤 결승전에 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반면 미국은 이번 대회 들어 고전하고 있긴 하지만 푸에르토리코전 역전승 이후 타선이 점차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투수 역시 베네수엘라 선발인 카를로스 실바보다는 한 단계 위인 제이크 피비가 출격을 준비하고 있다. 피비는 이번 대회에서 극도의 부진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구위 자체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평가다. 만일 피비가 컨디션을 회복해 4강전에서 정상적인 자신의 피칭을 선보인다면 상대하는 팀으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또 4강전을 통과해 결승에서 만나게 되는 상대도 문제다. 만일 결승에서 베네수엘라를 만난다면 상대 선발투수는 '킹 펠릭스'가 될게 분명하다. 쉽지가 않다. 베네수엘라를 결승보다는 4강에서 상대해야 하는 이유다.  반면 미국은 4강전 피비에

 

 

어 결승에서는 오스왈트가 출동한다. 오스왈트는 이미 한국이 두 차례 상대해본 경험이 있는 투수다. 어차피 결승에서는 최강의 상대를 만나게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4강전에서 만만한 실바를 상대하고 결승에서 익숙한 오스왈트와 대결하는 편이 낫다(일본과 결선을 치를 가능성도 여전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이 대회 주최국이 미국이라는 점이다. 메이저리그는 두 대회 연속 자국이 우승에 실패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를 원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비록 밥 데이비슨 같은 삼류 심판은 이번 대회에 나서지 않았다고 하지만,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미국은 2006년 대회 뒤 밥 데이비슨을 메이저리그 심판으로 승격시키며 애국심에 대한 톡톡한 사례를 한 바 있다. 심판들에게 애국심을 발휘할 동기를 만들어 놓은 셈이다. 만일 중요한 4강전에서 스트라이크존이나 미묘한 판정에서 불리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승을 향한 여정에는 큰 차질이 생기게 된다. 반면 결승전의 경우에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경기이기 때문에 4강전보다는 장난을 칠 여지가 줄어든다고 봐야 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20일 열리는 한일전은 반드시 이길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보다는 이 경기에서 힘을 비축한 뒤 4강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미국 또는 일본과의 결승전을 대비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물론 '일부러 지라'는 의미는 아니다. 야구에서 흐름이란 것은 매우 미묘해서, 공연히 고의로 경기를 패배하다가는 과거 삼성이 롯데에게 당한 것처럼 나쁜 결과가 찾아올 수도 있다. 나는 단지 20일 경기가 이기기 위해 전력을 다할 필요가 없는 경기라는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것 뿐이다. 


다행히 김인식 감독도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감독은 일본전 선발로 그간 출전이 적었던 좌완 장원삼을 예고했다. 기왕이면 그간 출전이 적었던 손민한도 기용해 보고, 벤치에 있던 선수들을 두루 사용하면서 경기하면 더 좋다. 한국은 이 경기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일본이 아니라 더 높은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기면 좋고, 져도 4강전부터 전력을 총동원할 수 있기에 나쁠 것은 없다. 20일 일본전이 갖는 의미는 딱 그 정도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