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원소변호론(袁紹辯護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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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2.본론
2-1.원소의 능력
2-1-1.대(對) 십상시의 난
2-1-2.대(對) 백마장군
2-2.원소의 실책
2-2-1.대(對) 군웅(君雄)
2-2-2.대(對) 자식
3.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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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군웅할거 시대,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패웅(覇雄)들 중에서 으뜸이라 하면 단연 원소를 꼽을 수 있다. 원소는 동탁이 조정을 점거하자 단숨에 낙양을 뛰쳐나와 동탁에게 반기를 들었고, 반동탁연합의 수장으로써 동탁이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하게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그는 그 전에 한의 대장군 하진의 수하에 있을 때에도 십상시가 반란을 일으켜 대장군 하진을 참수하자 빠른 군사 행동으로 그들을 진압했다. 그리고 반동탁연합 해산 이후에는 탈취한 기주를 바탕으로 그의 큰 적수였던 공손찬을 무너뜨린다. 그런 그는 결국 몇 가지 실수로 인해 자신과 자신이 이루어 놓은 가업을 멸망시켰고 이 시대에 있어서 그는 큰 오명(汚名)이 남겨지고 말았다. 지금부터 그의 힘과 장점을 논하고 실책을 변호함으로써 그의 오명을 조금이나마 씻어주었으면 한다.
2.본론
2-1.원소의 능력
2-1-1.대(對) 십상시의 난
『이때 원소는 하진에게 이 기회를 시작으로 하여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재삼 진언했지만, 하진은 동의하지 않았다. [중략] 또 원소의 동생 호분중랑장 원술로 하여금 부하 근위병 중에서 온후한 성격을 가진 2백 명을 선발하여 곧 황궁으로 들어와 무기를 들고 환관과 교체시켜 궁중 문을 경호했다. 중상시 단규 등은 태후의 명을 빌려 하진에게 상의할 일이 있으니 궁중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하진을 살해하니, 궁중은 혼란스런 상태가 되었다. 원술은 근위병을 인솔하여 남궁(南宮) 가덕전(嘉德殿)과 청쇄문(靑瑣門)을 불지르고, [중략] 원소는 환관을 참수하였고 사예교위 허상(許相)을 죽이고, 병사들을 지휘하여 모든 환관들을 붙잡아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모두 죽였다. [중략] 원소가 급히 단규 등을 추격하자, 단규 등은 모두 황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결국 황제는 궁전으로 돌아왔다.』- 정사 원소전 中
「호분중랑장 : 주나라 때 궁중의 근위관으로 출발한 관직. 한나라 때 궁중의 근위관을 호분중랑이라 하고 그 책임자를 호분중랑장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 이후 이 칭호가 남용되어 무게를 잃어 가다가 당나라 때는 중급 장교 정도의 지위로 떨어졌다.」 - 후한 관제 中
여기에서 보듯 그는 이미 십상시가 반한지난(反漢之亂)을 일으킬 것을 알고 그들을 제거한다고 진언했다.(비록 하진이 듣지 않았기는 하지만) 또한 그는 자신의 동생을 호분중랑장이라는 궁성의 근위관으로 심어놓기까지 했다. 이것은 궁에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 빠른 진압을 위한 초석(礎石) 역할을 하며, 만약 하진이 죽었을 경우 자신이 군사력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만든다. 이 부분에서 원소는 이미 십상시의 반란, 반란 후, 하진 사망 후라는 세 가지 케이스까지 생각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세우는 계책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많은 준비와 결단력으로 그는 십상시의 난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군사들을 동원하였고 빠르게 반란을 진압해 황제를 옹립하게 된다. 만약 원소가 조금이라도 군사 행동이 늦어서 황제를 옹립하지 못했을 경우, 십상시들이 바로 움직여서 진유왕 유협을 즉위시키면 한(漢)은 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경우 원소, 조조, 원술 등은 모두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는 것이다. 고로 이런 그의 순발력과 의기는 누구 못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황제를 데리고 달아나는 십상시들을 혹시 모를 매복과 함정의 가능성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추격해 황제를 옹립하는 그의 대담성 또한 높이 사줄 만 하다.
2-1-2.대(對) 백마장군
『공손찬은 이 점을 원술이 듣고서 원망할까 두려워하여 그의 사촌동생 공손월(公孫越)에게 기병 수천 명을 인솔하여 원술에게 가서 손을 잡게 하고 [중략] 원술은 손견을 보내 양성에 주둔시켜 동탁에 대항하도록 하였고 [중략] 원소는 주앙(周昻)을 보내 그곳을 탈취하도록 하였다. 원술은 공손월과 손견을 보내 주앙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공손월은 날아오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으니, 공손찬은 격노하여 말했다.
[중략]
원소는 두려웠으므로, 자기가 차고 있던 발해태수의 인수를 공손찬의 사촌 공손범(公孫范)에게 주고, 그를 발해군으로 보내어 공손찬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 공손범은 발해 군대를 이끌고 공손찬을 도와 청주와 서주의 황건을 격파시키니, 군대는 더욱 강성해졌고 계교(界橋)까지 진군하였다. [중략] 원소는 광천(廣川)에 진을 치고, 대장 국의(麴義)를 앞쪽에 배치하여 공손찬과 싸우게 하였고 엄강을 사로잡았다. 공손찬은 발해에게 달아나 공손범(公孫範)과 함께 괵주로 돌아와 큰 성 동남쪽에 작은 성을 만들었는데, 유우가 있는 곳과 접근해 있었으므로 점차 서로 원한을 품고 바라보게 되었다. [하략]』 - 정사 공손찬전 中
원래 원소나 공손찬이나 서로 직접 대결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공손찬은 원술과 협력하기 위해 공손월을 원술에게 보냈고 원소는 주앙을 파견해 원술의 양성을 공격했을 뿐이다. 공손월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는데 유시는 후에 서황같은 명장도 맞아 죽었을 정도로 우연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공손찬은 원술과 원소의 싸움에 자신의 동생이 희생되었고 그에 격분해 원소를 공격한다. 공손찬은 원소에 비해 군사가 많았고 병과도 보병에게 매우 유리한 기병과 철기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공손찬은 결국 계교에서 원소에게 패하고 만다. 공손찬은 절대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소에게 패배하는 것은 결국 지휘하는 장수 역량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공손찬은 이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그래도 그의 군마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다시 유우를 참수하고, 원소와 제대로 접전을 벌일 상황이 되었다.
『원소는 또 국의와 유우의 아들 유화에게 군사들을 지휘하게 하여 선우보와 합류시켜 공손찬을 공격하도록 했다. 공손찬은 몇 차례 싸움에서 지더니 역경(易經)으로 도망가 수비만 공고히 했다. 그는 열 겹의 참호를 파고, 참호 뒤로는 아주 높은 흙산을 쌓았는데, 높이는 대여섯 장이나 되며, 그 위에 누각을 만들었다. 참호 안 중심에 쌓은 흙산은 그 높이가 십 장(丈)에 이르며, 그 자신은 그 위에 머물렀고 그곳에 3백만 석의 곡물을 쌓아 놓고 있었다.
[중략]
그는 이런 방법에 의지하여 원소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소는 대장을 보내 공격했지만 , 몇 년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중략]
구원병이 도착한 후, 공손찬은 안팎에서 원소를 공격하려고 사람을 시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날을 정하고, 군대가 도착하면 횃불을 들어 알리도록 했다. 원소의 염탐꾼이 그 편지를 손에 넣어 약속한 날에 횃불을 들었다. 공손찬은 구원병이 도착하였다고 생각하고 병사를 내보내어 싸움을 시작했다. 원소는 복병을 숨겨 놓고 공격을 하였으므로, 공손찬은 크게 패배하고 돌아와 수비를 굳게 했다. 원소는 땅 밑으로 길을 파서 돌격하여 누각을 무너뜨리고, 공손찬이 살고 있는 중앙의 흙산 가까이까지 갔다. 공손찬은 자신이 졌음을 알고, 처자식을 전부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 정사 공손찬전 中
원소는 역경의 성채를 함락시킬 수 없었지만 결국에는 공손찬이 실행하려는 책략을 간파하고 그것을 역이용하는 계략까지 짜낸다. 이미 구원병이 도착했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중점시하기 보다는 자신의 군대의 안팎에서 들어올 양동 공격을 저지시키고 각개격파하기 위해 군대를 양분하는 방법을 썼다. 그리고 각개격파 당해도 공손찬이 불리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소는 그로기 상태에 빠져있는 공손찬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공손찬을 자살까지 이르게 한다. 이런 그의 병법과 술책은 조조에게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할 수 있다.
2-2.원소의 실책 변호
2-2-1.대(對) 군웅(君雄)
『원소는 결국 발해군에서 군대를 일으켜 동탁을 정벌하려고 했다. [중략] 공손찬은 군대를 인솔하여 기주로 들어왔다. 동탁을 토벌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사실은 한복을 습격하려는 것이었다. 한복은 마음속으로 불안했다. 마침 동탁이 서쪽에서 함곡관으로 들어갔으므로, 원소는 군사를 돌려 연진(延津)에 주둔했다. 그는 불안해하는 한복의 마음을 움직여 진류 사람 고간(高干), 영천 사람 순심(荀諶) 등을 한복에게 보내 설득조로 말했다.
[중략]
“공손찬은 연(燕)․대(岱) 두 군의 군대를 인솔하고 있으므로 그의 예봉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원소는 일대의 호걸이니, 반드시 장군의 밑에 있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주는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중략] 지금 장군을 위해 생각해 보면 모든 기주를 원소에게 주는 것만 못합니다. 원소가 기주를 손에 넣으면, 공손찬은 그와 싸울 수 없을 것이고, 원소는 틀림없이 장군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 기주가 친교있는 사람(원소)에게 옮겨지면 장군은 현명한 인물에게 나라를 양도했다는 명성을 들을 것이고, 장군의 입장은 태산보다 더 편안할 것입니다. 모쪼록 장군께서는 이 점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략] 』 - 정사 원소전 中
이처럼 원소는 기주를 차지하기 위해서 한복을 밀어냈다. 그러나 그것은 간사로운 방법이 아닌, 고간과 순심을 보내 설득시켜 그를 항복하도록 권고시킨 평화로운 방법이었다. 병법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쓰여진 만큼, 그가 기주를 차지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복의 수하들이 그에 반발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는 기주에 무혈입성(無血入成)했다. 그는 한복과 싸워서 충분히 이길 수 있었고, 한복을 도와 공손찬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기주를 차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주를 차지하는 방법은 설득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은 한복이라는 상대를 잘 알고 선택한 그만의 영지 개척 방식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2-2-2.대(對) 자식
『건안 7년(202), 전쟁에서 패한 이후 중병이 들어서 근심 속에 죽었다.
원소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으니, 장남 원담과 차남 원상(袁尙)이 그들이다. 원소의 처 유씨는 원상을 총애하여 그의 재능을 자주 칭찬했고, 원소 또한 원상의 빼어난 용모를 추켜세워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공표하지도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 정사 원소전 中
이처럼 후계자를 정한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물론 평소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다. 그러나 원상을 후계로 정할 만한 행동을 보인 것이 그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원담이 비록 곽도, 신비, 신평 등과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원상은 원소대의 그 군사력을 그대로 유지했고 조조와도 대등한 군사력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끝에 자신의 세가 다했지만 조조에게 항복하거나 자살하지 않고 요동까지 도망쳐 계속 조조에게 항전한 행위는 원소가 후계자로 삼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원소의 후계자 관련 실책은 원상을 후계자로 정한 것이 아닌, 원담을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 실책이라 할 수 있다.
3.결론
난세의 군웅이었던 원소 본초. 결국 그는 관도대전(백마 - 창정 전투까지를 모두 통합)에서 세를 꺾이지만 곧 세를 회복하고 그 아들에게까지 권력을 물려줄 만큼의 세를 유지한다.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기 전까지 전 중화에서 제일 큰 세력을 가졌던 원소 본초. 비록 그의 판단에 실책이 있고 책사들의 말을 듣지 않은 건 그의 잘못이지만 공손찬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대담성과 기력, 십상시의 난을 평정하면서 보인 순발력, 기주의 한복을 설득시키면서 보인 판단력은 지금 우리가 그에게 하는 평가보다 월등히 높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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