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보라 & へ山行
Life & Culture/Common Sense

윤선도

by 유리의 세상 2010. 8. 31.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윤선도 /윤선도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부정공(副正公) 유심(唯深)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8세 때 백부인 관찰공(觀察公) 유기(唯幾)의 양자로 가서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이었다.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1616년(광해군 8)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慶源)·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 봉림(鳳林)·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났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山陵)문제와 조대비복제(趙大妃服制)문제가 대두되었다. 남인파인 윤선도는 송시열·송준길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로써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삼수(三水)로 유배를 당했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현종 12)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의 하별집(下別集)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 夢天謠〉 5수, 〈우후요 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 〈산중신곡〉 18수 가운데 〈오우가 五友歌〉는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을 읊은 시조로 널리 애송되었다. 〈어부사시사〉는 효종 때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전남 완도의 부용동은 보길도에 있는 고산 윤선도의 원림이다. 고산 윤선도는 제주도로 가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이곳 보길도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보길도의 풍광에 반해 이 세연정 부근을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전통 정원을 꾸몄다. 부용동은 자연 계곡을 막아 연못을 만들고 연못 가운데 세연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아름다운 정원을 꾸몄다. 윤선도는 이곳에서 어부사시사 등의 글을 썼다고 한다. 이 부용동은 담양의 소쇄원 그리고 영양의 서석지와 함께 3대 전통정원으로 꼽히는데 이 세 정원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 이 부용정이라 할 수 있다.

 

보길도 내의 도로는 단순하고 이정표가 잘 갖춰져 있어 보길도 지도 한 장만 얻으면 어디든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노화도 산양진항이나 보길도 청별항에서 보길도 지도를 한 장 얻으면 된다.

 

동천석실

 동천석실은 윤선도의 고택이었던 낙서재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정자이다. 이 정자의 용도는 아직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윤선도의 개인 서재로 추정되고 있다. 동천석실에 올라서면 낙서재와 낙서재 앞 들판과 낙서재 뒷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조망을 즐길 수 있다.


동천석실은 세연정에서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있다. 길가에 차를 주차시키고 산길을 약 20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점심식사

점심은 다시 청별항으로 나와 해결하는 것이 좋다. 보길도의 음식점들은 거의 다 청별항에 모여 있다.

예송리해수욕장

 예송리해수욕장은 작고 동글동글한 조약돌이 깔린 해변이다. 활처림 길게 휘어진 해변이 해변 산책을 즐기기에 아주 좋다. 예송리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언덕 길가에 있는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예송리해수욕장의 풍경도 포근하기 그지없다.

 

갈두항으로 이동

갈두항으로 이동하려면 다시 노화도의 산양진항으로 가서 여객선을 타야 한다. 15:00 배가 있으므로 30분 전에는 미리 산양진항으로 가서 표를 끊고 차를 배에 싣는 것이 좋다.

갈두항 배편 안내



땅끝마을

 해남의 땅끝마을은 한반도의 최남단에 자리한 마을이다. 한반도의 최남단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땅끝마을은 경치도 좋은 곳이다. 정확히 관광지로 알려진 땅끝마을은 갈두마을이라고도 불리는 땅끝마을에서 조금 더 올라가야 하는 사자봉을 말한다. 이 사자봉에는 땅끝전망대 건물이 서 있다. 사자봉 아래 땅끝마을에서 보기에도 아주 잘 지어진 건물인데, 굳이 이 전망대 건물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전망대 아래에서 사자봉의 전망을 다 볼 수 있다. 사자봉 바로 아래 주차장에서 땅끝전망대에 이르는 작은 오솔길을 오르며 바라보는 해안 풍경도 아름답다. 멀리 아래로 해안선이 곱고, 점점히 떠 있는 섬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사자봉 땅끝전망대 아래에는 작은 토말비가 있고, 이 토말비 옆으로 작은 내리막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바닷가에 서 있는 땅끝탑이 있다. 땅끝탑까지 내려가는 경우는 다시 사자봉 쪽으로 올라가지 않고, 옆길로 빠져 해안을 따라 땅끝마을로 가는 길도 있다. 최근에는 갈두마을에서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모노레일을 타고 사자봉에 오를 수도 있다.

 

갈두항 바로 뒤가 사자봉 전망대다. 모노레일 승차장 부근에 차를 주차시키고 모노레일을 타고 사자봉 전망대로 올라가 토말비와 땅끝탑을 보고 해변길을 따라 모노레일 승차장으로 돌아오면 된다.

 

저녁식사

저녁은 다시 해남읍으로 나와 먹는 것이 좋다. 저녁은 떡갈비로 유명한 해남의 천일식당(061-535-1001)에서 떡갈비를 먹어보는 것도 좋다. 집은 허름하지만 이 집 역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집이다. 떡갈비정식(18,000원)과 한정식(13,000원)이 있는데, 떡갈비정식은 한정식에 떡갈비가 추가된다. 떡갈비의 맛은 아주 좋지만 최근에 가격이 너무 오른 듯한 느낌이다. 해남에는 이외에도 맛집이 많으니 해남의 맛집들을 참고하여 적당한 음식점을 고르면 된다.

 

땅끝마을에서 해남읍으로 갈두삼거리로 나가 좌회전해 77번 국도를 타면 된다. 이 길을 따라가다가 신정사거리에서 우회전한 뒤 다음 삼거리에서 해남 방향으로 좌측길을 따라가면 된다. 이 길을 가다가 초호삼거리에서 좌회전해 13번 국도를 타고 해남읍으로 들어가면 된다.

 

숙박

 남도 여행이니 이번 여행에서는 한옥 민박에서 묵는 것이 제격이다. 또 다음날 일정이 대흥사에서 시작되는 점을 고려해 대흥사 앞에 숙소를 잡는 것이 좋다. 대흥사 앞에는 유선여관(061-534-3692)이란 유명한 한옥이 있다. 유선여관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원래 대흥사를 찾는 손님들이 묵던 객사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여관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장작을 때던 방구들이 보일러로 바뀌는 등의 변화는 있었지만 단아한 한옥 건물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여관 주변이 계곡과 숲으로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자연 속에 들어앉아 있는 집이다.

 

방은 모두 여닫이 창호지문이고 방 뒤쪽으로도 역시 창호지문이 큼직하게 자리하고 있어, 앞뒤로 문을 열면 방은 곧 시원하게 트인 공간이 된다. 그리고 건물 전면으로는 길게 툇마루가 이어져 있어, 방문을 열고 툇마루에 걸터앉는 재미도 은근하고 쏠쏠하다. 취사는 되지 않고 화장실은 별도의 화장실 건물을 사용해야 하는데 남녀 화장실이 구분되어 있고 깨끗한 편이다. 숙박비는 방의 크기에 따라 3만원부터 6만원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