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이견 (李堅)은 고려 공민왕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그는 1360년(고려 공민왕 9년) 홍건적이 의주(義州), 정주(定州), 서경(西京) 등지에 침입했을 때 도원사(都元師) 이방실(李芳實)을 도와 개성부사 신부와 함께 상장군으로 출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함종(咸從)전투에서 순절, 공신이 되었다. 시조 이견은 경남 의령군 궁면 지동리 일원재 설단에 봉향중이다. 이견의 아들 이정림(李挺林)이 황해도 안악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세거 하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이견의 손자이자 이정림의 아들인 이의만(李義萬)이 고려 말에 문하찬성사에 임명되었으나 화를 입고 경상도 창원 지방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쳤으므로 후손들이 창원, 의령, 단성, 함안 등지에 집단 세거하게 되었다. 이몽득은 이성계와 함께 황산전투에 출전, 왜구를 섬멸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몽득은 그러나 최영 장군의 자주노선을 지지했다. 결국 최영 장군이 실각, 처형되자 벼슬을 버리고 평남 숙천에 은거했다. 포은 정몽주도 안악이씨 이영진의 처남으로 안악이씨는 이래저래 반이성계 노선에 서며 박해를 받게 됐다. 3세 이의만(李義萬)도 고려 말에 화를 입어 영남 땅에 유배됨으로써 창원에 세거지를 이루었다. 4세 흥부(興富)는 우왕(禑王) 때 경상도 지병마사에 임명되어 밀성(密城 : 지금의 밀양) 지역에 내침한 왜구를 격퇴시켜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승격되었고 그의 동생 흥인(興仁)은 진주만호(晋州萬戶)에 재임 중에 내침한 왜구를 격파하고 전함을 포획하여 왕으로 부터 백미 20석을 하사받았으나「이것이 어찌 나 혼자만의 공이겠느가」하고는 그 쌀로 술을 빚어 병사에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 임금 자리에 오르자 안악이씨 후손 이계을(李桂乙.판전리사사)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계을은 이흥인의 손자다. 이계을의 아들 이신(안악감무)도 두문동 산기슭에 아버지를 장사지낸 뒤 그 묘 앞에서 따라 자결했다. 이신(첫이름은 양소)은 두문동 72현에 꼽힌다. 뒷날 조선의 세종은 부자의 충절을 기려 이신을 안악군에 추봉하고 그때까지 양산이씨(楊山李氏)로 써오던 관향을 안악(安岳)으로 고쳐 일컫게 했다. 이신의 아들 이구관은 세종의 명으로 명으로 안악군수,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후에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그 지방에 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이운장(李雲長)은 의병장으로 정암진에서 왜적을 섬멸하고 전사했다. 이잠(李潛)은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왜적과 격전 후 순절했다. 이현우(李鉉祐)는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 계미년 7월 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투옥 중 심한 구타에도 물구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짖다가 을유년 8월15일 출옥했다. 그러나 심한 통증으로 52세로 별세했다. 한말 평양에 주둔했던 무관 이기호의 아들이자 6.25 때 운봉(雲峰)에서 비행기 사고로 순직한 이용문(李龍文) 장군은 안악이씨의 인물이다. 그는 육군정보구장, 수도사단장, 서부지구경비사령관 등을 지내며 과단, 강직한 군인으로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해군참모총장을 지냈으며 제3공화국 때 해외에서의 반(反) 박정희정권 활동으로 화제를 일으켰던 이용운 예비역 중장과 법조계의 이건개 법무연수원기획부장 겸 대검검사도 있다. 이용운 중장은 바로 이용문 장군의 형이며, 이건개 검사는 이용문 장군의 아들로 이 중장이 이 검사의 큰아버지가 된다. 현대 인물은 이배석(경남대경영대학원장), 이찬국(국제신용금고감사), 이갑천(대한수퍼마켓사장, 대종회장), 이희억(의학박사, 병원장), 이방치(대한항공연구회장), 이현도(대호산업사장), 이영술(백일제면사장), 이규석(군농협이사), 이병진(산청향교전교), 이관기(풍미제약사장), 이덕제(서부산업상무이사), 이훈경(국문학자), 이화석(대화의원장), 이영석(동명한의원장), 이건종(검사), 이도순(한국상운대표), 이상호(대우개발이사), 이필낙(울산수산조합장), 이후직(용산구청시민국장), 이상건(서울대병원의사), 이기증(구도중감문분교장), 이민희(영월초등교장), 이만희(진주식품공업사 상무이사), 이병수(산청군향교전교), 이영화(새마을본부 성남연수원교수),이용호(이사관, 대종회감사), 이훈경(국문학자, 대종회총무), 이세준(대종회부회장), 이석진(대종회부회장), 이순계(대종회부회장), 이규환(대종회고문), 이규택(대종회고문), 이석만(대종회고문), 이종철(대종회고문), 이문현(대종회고문), 이갑철(대종회총무간사), 이석필(대종회총무), 이녹식(대종회총무), 이석구(대학서무과장, 대종회감사), 이용득(대종회감사), 이명제(동대구상사대표, 대종회종무간사), 이종림(평통자문위원), 이중철(대구조미식품대표), 이영호(연지회관대표), 이대호(태화토건대표, 대종회종무위원), 이하원(영풍전무이사, 대종회종무위원), 이규철(음성요식협회장, 대종회종무위원), 이근식(쌍패초교장), 이영이(고양여중교감), 이근명(초등교장), 이화석(의학박사, 대화의원장) 씨 등이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주요파는 군수공당한파(郡守公唐漢派), 무당공이수파(無憂堂公耳壽派), 죽림공운기파(竹林公雲起派), 죽헌공운장파(竹憲公雲長派), 진사공욱파(進士公郁派), 진사공침파(進士公沈派), 참봉공기파(參奉公奇派), 참봉공운행파(參奉公雲行派), 참봉공팽령파(參奉公彭齡派), 참봉공해파(參奉公瀣派), 참의공잠파(參議公潛派), 첨정공송령파(僉正公松齡派), 학생공맹파(學生公孟派), 학생공억정파(學生公億楨派), 학생공운승파(學生公雲勝派), 학생공응벽파(學生公應壁派), 학생공의파(學生公誼派), 호당공희순파(湖堂公希舜派) 등이다. 본관 안악(安岳)은 황해도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양악군(楊岳郡)이라 했고 신라 때에는 장구진(長口鎭)에 속하였다. 고려 초에 안악으로 개칭되어 1018년(현종 9) 풍주(豊州)에 편입되었다가 1106년(예종 1) 감무를 두었다. 1348년(충목왕 4)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589년(선조 22)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08년(선조 41)에 다시 군이 되었다. 8?15해방 당시에는 안악읍?대원면?용순면?은흥면?대행면?서하면?안곡면?용문면?문산면 등 1개 읍 8개 면 113개 리였다. 북한은 1952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안악군의 일부를 은천군으로 분리시켰고, 신천군의 일부를 넘겨받아 안악군의 영역을 조정하였다. 1954년에 재령군의 신환포리 일부가 덕성리로 편입되었고, 남정리 일부를 평정리로, 구와리 일부를 복사리로, 대추리 일부를 굴산리로, 노암리 일부를 한월리로 각각 편입시켰다. 1974년 에는 유설리 일부를 덕성리와 노암리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유설리는 오국리와 통합시킨 후 유설리는 폐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남도 안악군이다. 집성촌은 경남 의령군 궁류면 다현리, 경남 고성군 개천면 좌연리,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 경남 산청군 오부면 오전리, 경남 의령군 칠곡면 산남리, 충북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 등이다. 특히 3세 이의만의 후손은 670여 년 동안을 경남 의령군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조선시대에 모두 2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문과 5명, 무과 11명, 사마시 12명, 역과 1명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안악이씨는 1985년에는 총 1,980가구 7,973명, 2000년에는 총 2,961가구 9,50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1천여 가구, 2천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387명, 부산 1733명, 대구 438명, 인천 184명, 경기 464명, 강원 169명, 충북 429명, 충남 87명, 전북 40명, 전남 78명, 경북 265명, 경남 2691명, 제주 8명이다. 경남, 부산, 서울 지역에 많았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1,451명, 부산 1,845명, 대구 607명, 인천 248명, 광주 17명, 대전 103명, 울산 336명, 경기 1,118명, 강원 199명, 충북 478명, 충남 113명, 전북 60명, 전남 48명, 경북 264명, 경남 2,606명, 제주 14명이다. 경남, 부산, 서울, 경기 지역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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