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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라 & へ山行
Life & Culture/Letters

Re:밀양의 불가사의

by 유리의 세상 2008. 11. 6.

 

 

 

 

 

구구절절 미리벌 사랑이 뭍어나옵니다.

저또한 밀양인으로서 가슴 뿌듯한 마음, 자긍심이 일어납니다.

우리친구가 태어나고 사명대사가 태어나신 무안면 고라리...

그비석은 고라리에 있지않지만 비석의 해설문을 올려봅니다.

 

 

 

■ 땀흘리는 “사명대사 비문” 해설

 

우리선조 임금 25년에 일본놈들이 많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옴으로 선조는 서북 신의주 변방으로 피난하시고 흉봉이 팔도에 침입함에 안 밖으로 국록을 먹는 자들은 꿩이나 토끼처럼 도망하니 적은 드디어 우리나라를 마음대로 짓밟았다.



  이때 송운대사 유정은 불교를 닦고 있었는데 석장을 집으시고 고성에 들어가서 적에게 살생을 즐기지 말라고 타이르니 적이 대사의 그 위엄이 늠름하신 것을 보고는 곳 일어나 공손히 절하고 그 무리들을 훈계하니 이로 말미암아 영동구군은 비참을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유정은 강개한 어조로 모든 스님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잘살고 있는 것은 모두 임금의 덕택이며 나라의 위태함이 이에 이르렀거늘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시고 곧 수백명을 모병해 가지고 급히 순안의로 달려갔다. 이 때에 송운대사님의 스승인 휴정은 팔도도청성에 임명되어 있었으나 늙었으므로 사퇴하고 사명대사를 천거하여 자기의 대로 하니 드디어 유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와 협동하여 평양적을 파하고 도원수 권률을 따라 영남에 내려가 수차 적을 참획하였으므로 임금께서 감탄하시어 당상관을 제수하시고 유총병정을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왜영에 들어가 청정을 개유하였는데 세번 왕복하여 그 요령을 얻은 것이 많다.



  청정이 조선에 보배가 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으니 네 머리가 바로 그것이다 하니 청정의 낯빛이 창백했다 한다. 돌아오는 임금이 내당에 불러 정탐한 왜적의 정세를 낱낱이 묻고 곧 전교하기를 옛날에 유병총과 요광효는 모두 산인으로써 국가에 공훈이 많더니 너도 만일 머리를 기르고 속인이 된다면 백리의 땅과 삼군의 명을 무엇이든지 맡기리라 하셨으나 대사는 감히 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 뜻을 굽힐 수 없으므로 특히 갑옷과 무기를 내리어주고 남은 적을 치게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또 성을 쌓고 한편으로는 군량미와 병기등을 굳게 보완하고 곧 인수를 올려 나이가 많으므로 쉬기를 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정유년에 왜적이 다시 침입합에 대사는 명나라에서 새로 들어온 마귀와 유정을 따라 갖은 포악을 해온 왜적을 평정하였다. 임금께서는 특별히 가선대부에 올려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신축년에 또 부산산성을 쌓고 갑진년에는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니 모든 왜놈이 서로 돌아보고 놀래며 두려워하였다. 오직 삼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남녀 삼천 수백명을 데리고 와서 임금께 복명하니 임금께서 칭찬하시고 가의대부에 올리고 말과 옷감 등을 내리어 포장하였다. 그후 대사는 나이가 많으므로 사직하고 치악산에서 가야산에 들어가 경술년 가을에 별세하였으니 세수 67이요 중 나이 57이다.



  장사하던날 저녁에 사리 한 구루를 얻어 석종에 간직하고 도파를 세웠다. 대사는 풍천 임씨이며 아버지 수성이 달성서씨에게 장가드시어 가정 갑진년에 대사를 낳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차차 자라 글을 읽다 홀연히 깨닫고 황악산에 들어가 머리를 깍았다. 자는 이환이라한다. 재주가 일찍부터 뛰어나니 소재, 사암, 고봉, 제봉같은 여러 높은 사람들과도 잘 알게 되고 또 시인 최가운, 허미숙, 임자순, 이익지 등과도 시로써 놀게되는데 시를 주고 받고 하는것이 훌륭하였다. 사명집이 있어서 세상에 간행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가 대사의 한 찌꺼기만 남은 것이며 진실한 것은 볼 수 없어 정녕 말할 것이 못된다. 오직 품기가 호일하고 사리에 달관하는 식견이 있고 지혜에 밝았다.



불교에 쫓았는데 그 교에 억메이지 아니하고 세상에 나와서 난리를 그치게 할 뜻을 품었으므로 인륜을 떠났으나 나라를 지킬 성심이 돈독하여 적의 세력이 조수와 같이 밀려들어 온 나라가 어지러운 때 명나라 장수들을 맞으되 능히 막지 못한것을 한마디 말로서 ant 왜를 굴복시키고 한자의 칼로서 뛰어난 공훈을 세우니 공(불교)을 말하고 환(불)을 말하는 한 중에 비할 바 아니다. 임금께서도 옛날의 영걸에 비교하여 그 포부가 보통이 아닌 것을 잘 알 수 있으니 어찌 한 시대의 의부가 되고 한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영남 밀양 표충사(表忠祠)에서 사명대사를 향사하는데 휴정대사는 처음에 난을 감당한 공이요. 영규는 적을 섬멸한 공이 현저하고 또 순절하였으므로 대사와 함께 향사한다. 숙종대왕때 명령을 내리어 제수를 관에서 주었고 지금 임금께서 또 명하여 복호를 주니 이것은 아름다운 풍속을 후세에 권장하는 까닭이다. 대사는 일찍이 수염을 깍지아니하고 그 길이가 띠에까지 이르러니 또한 훌륭하였다. 지금 유상이 표충사(表忠祠) 영당에 있다. 내가 본래 중에게 문자지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글을 지어 달라는 청이 오더라도 거절하였으나 오직 대사의 사적은 특히 훌륭하고 뛰어났으므로 참아 의례상으로 다른 것과 같이 물리치지 않고 드디어 새기게 되니 그 말에 이르기를 사람에게 오륜이 있으니 첫째는 군신이다. 전쟁에 나아가 의를 위해 분기하니 나라는 있고 몸은 없었다. 이것이 정리요 명교를 따르는 바이로다.



  범서를 읽고 바릿대를 가지면 부처이요 사람은 아니다. 홀로 절만 지키고 불경만 읽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세상의 위란을 보고 어찌 가슴 속에만 신음할 것인가. 거룩하다 송운은 행동은 환이요 마음은 진이다. 수염이 무릎에 이르니 그 정신이 더욱 빛났다. 그 본 뜻을 생각하니 중의 의관에 만족함이 아니로다. 임진왜란이 졸지에 일어났음에 난리를 밝히겠다 맹세하고 군사를 모으니 무리를 뽑으니 군사의 규률이 새로워졌다. 유점사에서 중생을 구제하니 감화가 왜적에도 미쳐서 아홉 고을이 편안 하니 사람들을 고루 살린 것이다. 서산이 먼저 하기를 사양하고 임금에게 알리더라. 군사지낸 대를 생각해보니 평양과 정진이다. 노획이 곱이나 많으니 바단과 은이 융숭하였다. 부산 적영에 세 번이나 갔다 올 때는 정성을 들여 힘을 다하였고 보배를 말할 때는 그 말이 장하였으니 기운이 가을하늘을 덮었다. 혀로서 칼날을 대로하니 멀리 강한 이웃이 항복하였다.



  칠년전쟁에 공이 백성에게 있었도다. 임금이 갸륵하게 생각하고 교서를 내려 순순히 이르기를 옛날 유병충과 요광효는 그 공훈을 기린에 비함직하니 너도 능히 뜻을 굽혀 속세에 나와 나를 도운다면 백리의 땅과 삼군을 맡기겠다 하였으나 스님은 절하고 이마 숙이고 감히 할 수 없나이다. 신은 늙어서 무능하오니 바라옵건데 인자하심을 드리우시와 다만 산 속에 들어가 잡나비와 새, 짐승과 서로 친하게 해주시면 이것이 신의 본뜻이라고 지성으로 아뢰고 편안히 돌아와 치악산에 들어갔다.



  은혜와 상을 거듭 내리니 표절이 순수한데 호광이 갑자기 살아지므로 법운이 마침내 기울어졌다. 탑묘는 공중에 솟았고 현주는 진귀함을 보았다. 밀양 무안에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천추에 길이 편안할 것이다. 유상이 사당에 있으니 상쾌한 기운이 고요히 서렸도다. 오직 이와 같이 포장하는 것은 대개 제사받들기를 신칙하여 이전과 같이 하지 아니하니 그 가리침이 이에 인함이요, 삼대사를 함께 향사하니 서로가 주빈되게 함이로다. 공에 보답하고 의렬을 들어냄이 깊이 후세에 미치게 하였다. 내가 그 일을 쓰고 정민에 새김은 스님들로 하여금 스승의 의리를 따르게 함이니 공허한 적막속에 빠지지 말고 스승을 따라 환난을 구제할 것이다.



영조 18년(1742년) 10월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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