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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7박8일의 삼국지 역사현장답사에 관한 글입니다. * 출처 - 포브스코리아
영웅의 자취 그대로 르포 / 三國志 역사의 현장
절찬리에 연재 중인 <삼국지경영학>의 필자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과 취재팀은 지난 5월 중경에서 형주와 무한을 거쳐 남경에 이르는 7박8일간의 삼국지 역사현장 답사를 다녀왔다. 위겳픸촉 삼국의 영웅들이 천하를 놓고 지모와 용맹을 겨룬 100년 역사의 현장. 삼국이 장강의 물결에 씻겨 내려간 지 어언 1,800년이 흘렀지만 영웅의 숨결은 곳곳에 살아있었다. -------------------------------------------------------------------------------- 중경(重慶)은 가릉강(嘉陵江)이 장강(長江)으로 합류하는 곳의 언덕에 자리 잡은 도시다. 산성이 둘러싸고 있는 시내는 기복이 심해, 중국 도시마다 달리는 자전거가 중경에는 드물었다. 5월 13일, 현지시각으로 오후 1시 무렵 도착한 우리 일행은 늦은 점심을 먹은 후 통원문(通遠門)을 찾았다.
산성의 여러 문 가운데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통원문은 중경임시정부청사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한 장수와 병사들이 성을 공격하는 동상이 눈길을 끌었다.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이 설명했다. “삼국지 당시 중경의 지명은 파군(巴郡)이었고 노장 엄안(嚴顔)이 태수를 맡아 지켰어요. 저 동상은 장비가 엄안에게 싸움을 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에요.”
장비는 엄안이 성문을 걸어잠그고 나오지 않자 꾀를 내 ‘파군을 우회하는 샛길을 통해 진격한다’는 정보를 흘린다. 이를 들은 엄안이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덮치지만 되레 장비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엄안은 “목이 떨어질 장수는 있어도 항복할 장수는 여기 없으니 목을 베려면 빨리 조용히 베어라”고 한다. 노장의 당당함에 감복한 장비는 엄안을 높은 자리에 모시고 연회를 베푼다. 엄안은 마침내 항복한다.
장비는 엄안 덕분에 한 개의 화살도 쏘지 않고 파주의 45개 관문을 모조리 항복받아 무혈점령한다. 7박8일의 삼국지 유적답사는 중경에서 출발해 장강삼협(長江三峽)을 타고 내려가 형주(荊州)와 무한(武漢)을 거쳐 남경(南京)에서 끝을 맺는다. 우리 일행은 최 전 부회장과 조선족 가이드 안승운 사장, 사진팀 권태균 부장 등 넷이다. 중경 ·남경 ·무한은 무덥기로 유명해 중국의 ‘3대 화로(火爐)’로 꼽힌다. “이 세 곳에서 지내려면 고생 좀 하시겠다”며 안 사장이 잔뜩 겁을 줬다. 하지만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고 다행히 해가 가려 그리 찌는 날씨는 아니었다. 삼국지의 주요 무대인 당양(當陽)과 형주, 남양(南陽), 양양(襄陽), 신야(新野), 융중(隆中), 적벽(赤壁), 감로사(甘露寺) 등을 순서대로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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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탄 유람선 장강천사(長江天使)는 첫날 밤을 중경에서 묵은 뒤 둘째 날 아침에 출발했다. 선실 기준 승객 정원은 172명인데 61명이 탔다. 승객의 대부분이 유럽인으로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지에서 왔다. 장강천사는 둘째 날에 풍도(都)의 귀성(鬼城)에 기항했다. 풍도귀성은 죽은 귀신들이 이승의 죄과를 심판받고 내세의 삶을 배정받는다는 곳이다. 입장료 20위안(약 2,600원)에 비해 경치나 사연, 건축물이 보고들을 게 없었다.
장강천사는 셋째 날인 일요일 아침에 백제성을 지나쳐 삼협에 접어들었다. 유비(劉備)의 한이 서린 백제성(白帝城)을 뱃전에 선 채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장강천사가 주요 고객인 유럽인을 대상으로 일정을 짰기 때문이다. 백제성은 파동(巴東) 인근에 있다.
유비는 제갈량을 비롯한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관우(關羽)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손권(孫權)과 결전을 벌인다. 그러나 유비는 참담하게 패한다. 유비가 쫓겨온 곳이 백제성이다. 유비는 성도(成都)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태자에게 황제의 재덕이 있어 도울 만하면 돕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승상이 스스로 성도의 주인이 되어 짐의 뜻을 이어주기 바라오”라고 당부하고 숨을 거둔다. 서기 223년, 유비의 나이 63세였다.
백제성을 지나자 바로 구당협(瞿塘峽)에 접어들었다. 오후에는 신농계(神農溪)에 기항했다. 신농계는 무협(巫峽)으로 유입되는 장강의 지류. 푸른 강줄기가 점점 좁아지고 대나무를 비롯한 아열대 식물이 무성한 양쪽 벽이 가까워졌다. 우리는 작은 배로 갈아타고 거슬러 올라간 뒤 다시 버드나무 잎 모양의 작은 배 유엽주(柳葉舟)에 몸을 실었다. 소수 민족인 토가(土家)족 가이드 아가씨가 수줍어하면서 부르는 민요가 청아하며 정겨웠다.
넷째 날 오전, 중국이 세계 최대의 수리(水利) 공사라고 자랑하는 삼협댐을 구경했다. 배는 낮 12시30분에 종착지인 의창(宜昌)에 닿았다. 뱃길 648㎞의 여정이 마무리됐다. 이제야 <삼국지>의 현장을 본격적으로 밟게 됐다. 의창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인 당양에 있는 관릉(關陵)부터 찾았다.
유비는 제갈량 ·장비(張飛) ·조운(趙雲) 등의 합류로 성도를 점령한다. 관우는 남아 형주를 지킨다. 양양을 단숨에 차지한 관우는 번성을 포위한다. 조조(曹操)는 “관우가 번성에 묶인 틈을 타 형주를 치라”며 손권을 부추긴다. 형주가 손권에게 넘어가자 관우는 맥성(麥城)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다. 관우는 맥성을 탈출하다 손권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당한다.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에 오른 서기 219년이었다.
패루를 지나 관릉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문을 통과하니 ‘의진인지(義盡仁至; 의가 다하여 인에 이르다)’라는 현판이 걸린 정전이 나온다. 수염이 탐스러워 미염공(美髥公)이라고 불린 관우가 그 수염을 비켜 쥐고 앉아 있다. 정전 뒤로는 침전이 나오고 그 뒤에 관우의 능이 있다. 봉분 위에는 잡목이 무성하게 자랐다. 가이드 안 사장이 “중국에는 무덤 위에 나무가 자라도록 하는 전통이 있는데 봉분이 무너지지 않고 도굴도 막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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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릉에서 5분쯤 가니 당양 시내다.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기마상이 날렵하다. 준수한 젊은 장수가 엄심갑(掩心甲 ·가슴을 보호하는 갑옷)에 아기를 품고 창을 결연히 끼고 있다. 조자룡이다. 장판파 패방(牌坊)이 조자룡상과 마주 서 있다. 패방 안에는 자룡각이라는 2층 누각이 있다.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원소(袁紹)를 물리친 뒤 유비를 친다. 유비는 형주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탁한다. 유표는 유비에게 조조와 전선을 이룬 북쪽 요충지인 신야를 맡긴다. 유비가 융중의 제갈량을 삼고초려 끝에 맞이한 곳이 신야다. 조조는 유비를 제거하기 위해 두 차례 군대를 보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공격에 나선다. 유비는 번성(樊城), 양양, 당양으로 차츰 밀린다. 조자룡은 당양의 장판파(長坂坡)에서 필마단기로 적진을 누비며 유비의 아들 아두(阿斗)를 구해온다. 조자룡은 충성심과 무용을 함께 갖추었으며 다른 데 한눈을 팔지 않아 군인의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 최 전 부회장이 “요즘 일본에서 나오는 삼국지 관련 책들은 조자룡을 부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양에서 형주로 가는 길, 들에는 밀이 누렇게 익어 가고 농부들은 유채를 수확한다. 관우가 최후를 맞은 맥성엔 작은 표지판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다.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오후 5시 무렵 형주에 도착했다. 초등학교 하교시간이었다. 자전거로 아들딸을 마중나와 태우고 가는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정겹다. 형주는 관우와 인연이 깊은 도시다. 그래서 관우를 기리는 유적이 많았다. 형주박물관에는 한수정후(漢壽亭侯)상과 기마관우상이 있다. 한수정후는 관우가 받은 직위. 형주성 빈양루(賓陽樓)는 청룡언월도를 세워놓았다. 형주시 중심병원에는 관우가 바둑을 두면서 화타에게서 치료를 받는 소조상이 있다. 저녁 식사 후에 형주를 출발,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양번(襄樊)에 도착했다. 양번은 옛 양양과 번성이 합쳐진 도시다.
이튿날은 ‘제갈량의 날’이 됐다. 우리 일행은 오전에 하남성(河南省) 남양의 와룡강(臥龍岡)에 다녀왔다. 오후에는 호북(湖北)성 양번의 고융중(古隆中)에 들렀다. 이 두 곳은 제갈량의 초려가 있던 자리를 둘러싸고 ‘무수한 합’을 겨루고 있지만 아직도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진팀의 권 부장이 박한제 서울대 교수의 경험을 들려준다. “95년에 양번에서 주최한 토론회서 박 교수가 주최 측 의도에 어긋나게 대답했답니다. 제갈량의 초려가 어디인지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한 거죠. 그랬더니 호북TV방송 뉴스와 양번일보 어느 곳에서도 박 교수의 말을 보도하지도 않더라는 겁니다.” 현재 판세는 양양에 기운 상태다. 저명한 역사지리학자인 담기양(譚其) 상해 복단대학 교수는 1990년에 “등현이 없어지면서 융중이 양양에 속하게 됐다”며 양양의 손을 들어줬다. 남양 와룡강에 있는 제갈량 사당 무후사(武侯祠)의 영련(楹聯겚竪纜?붙인 글씨첩)이 이런 판세를 짐작하게 했다.
심재조정 원무론선주후주(心在朝廷 原無論先主後主) 명고천하 하필변양양남양(名高天下 何必辨襄陽南陽) 마음은 조정에 둘 뿐, 본래 선주 ·후주를 구별하지 않았도다 이름이 천하에 드높으니 양양 ·남양을 따질 필요가 있는가
사연은 이렇다. 청대(淸代)에 호북 출신인 고가형(顧嘉)이 남양에 지부(知府)로 취임했다. 어느 남양 사람이 그에게 “공명이 은거한 곳이 양양이냐, 남양이냐”고 물었다. 출신지역으로는 양양 편을 들어야 하지만 부임지를 외면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 난처한 질문에 고가형이 위와 같이 둘러댔다는 것이다. 와룡강 무후사는 천고인룡(千古人龍)이라고 쓰인 패방(牌坊)과 와룡강이라는 석문에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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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초려와 우물이 복원돼 있고 후세 사람들이 제갈량을 칭송하거나 이곳이 융중임을 나타낸 비석이 즐비하다. 본전에는 은거구지(隱居求志)라는 편액(扁額 ·가로로 거는 액자)이 걸려 있고 제갈량이 온화한 얼굴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최 전 부회장이 설명한다. “남양은 (신야에서 오자면) 융중보다 거리가 멀고, 게다가 조조의 세력권에 있었기 때문에 유비가 세 번씩이나 찾아오기 힘들었어요. 이런 점으로 미루어 남양보다 양양이 맞다고 할 수 있어요.” 신야에서 남양은 70㎞ 떨어져 있고 양양은 60㎞ 거리다. 박한제 교수는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에서 “남양은 조조와 유표 등이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른 지역”이라며 “제갈량이 한가로이 농사를 짓기 어려웠다”고 했다.
고융중은 양양 서쪽 13㎞ 지점, 해발 306m 융중산 아래에 있다. 고융중이라 쓰인 패방을 지나면 제갈량이 뽕나무를 경작했다는 궁경전(躬耕田)이 나온다. 고융중에도 초려와 우물, 무후사 등이 조성돼 있다. “대부분 청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초려는 근래에 중국 국영TV가 삼국지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새로 지었다”고 안 사장이 설명했다. 융중산 정상에는 누워 있던 와룡 제갈량이 세상에 나와 등천한 것을 상징하는 등룡각이 우뚝 서 있다. 제갈량의 자취가 그대로 남은 유적은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나서도 여러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기림을 받으니 역시 제갈량이다.
저녁에 출발해 국도를 다섯 시간 달려 무한에 도착했다. 자정 무렵 24시간 여는 식당에서 허기를 달래고 무한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여섯째 날 일정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적벽은 무한 시내에서 두 시간 걸렸다. 적벽은 적벽산과 남병산, 금령산 등 세 곳으로 나뉜다. 모두 생각보다 크지 않은 야산이다. 남병산에는 제갈량이 동남풍을 빌었다는 배풍대가 있고, 적벽산에는 주유석상과 적벽대전 진열관이 있다.
금령산에는 봉추암(鳳雛庵)이 있다. 봉추는 신야 시절 유비에게 사마휘(司馬徽)가 “복룡(伏龍), 봉추 두 사람 중 하나라도 얻으면 천하가 안정될 것”이라며 천거한 한 사람으로 방통(龐統)을 가리킨다. 적벽산 주유군의 초소였던 익강정(翼江亭)에 올라 장강을 바라봤다. 강폭이 생각보다 좁아 1㎞ 남짓 정도밖에 안됐다. “삼국시대 이후 퇴적이 진행돼 강폭이 좁아졌나 봅니다.” 권 부장이 풀이했다.
강 너머로는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참패해 도망쳐 간 오림(烏林)이 있다. 북쪽 조조 진영이 절벽이라, 그 벽을 적벽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는데 반대였다. 건너편은 평지였고, 적벽은 남쪽이었다. 장강으로 내려가니 절벽 중간에 붉은 글씨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적벽(赤壁)’이다. 이 글자는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뒤 주유가 직접 썼다고 전해진다.
적벽산 위에는 주유의 석상이 당당하게 서 있다. 뾰족한 창이 붙어 있는 투구를 쓰고 갑옷 위로 외투를 드리운 석상이다.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얼굴은 오른쪽으로 돌려 장강을 바라보고 있다. 천하제일의 인재라고 자부한 주유의 기개가 느껴졌다. 그런 주유도 제갈량에게는 번번이 수를 읽히고 만다. 주유는 “천하에 주유를 냈으면 그만이지 어쩌자고 공명까지 냈는가”라고 통탄하며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다.
무한에서 남경까지는 기차를 탔다. 우리 일행은 4인1실 침대칸에서 12시간을 자거나 뒤척이다 남경에 도착해 일곱째 날 아침을 맞았다. 기차간과 비교하니 호텔이 더없이 으리으리하다. 남경에서 하루 묵을 곳은 5성급 장원루(壯元樓)호텔이다. 이 호텔은 역대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인물들의 초상을 그려 진열했던 곳이다. 그 그림 중 남은 일부는 강남공원 역사진열관에 옮겨져 있다.
장원루호텔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달려 감로사에 도착했다. 감로사는 유비가 손권의 여동생과 혼인을 맺은 곳이다. 감로사 입구를 지나면 두 영웅이 밤에 포부를 빌며 갈랐다는 시검석이 있다. 오후에는 손권릉이 있던 자리를 찾았다. 명 태조 주원장이 묻힌 효릉 근처였다. 그곳에 이제는 손권상만 서 있다. 손권상은 파란 눈에 수염이 붉고, 사각턱에 풍채가 웅대했다는 손권의 풍모를 잘 나타냈다.
번화한 오의항(烏衣港) 거리를 거니는 동안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이 천천히 깊어갔다. 오의항은 진회하가 장강으로 합쳐지는 지역이다. 손권이 이곳에 병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검은 옷을 입혔다고 해서 오의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웅들은 다 떠났어도 그 뜻과 기개는 다시 수천 년을 전해질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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