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창전투
성공할 것처럼 보였던 제갈량의 1차북벌은 228년 1월, 기산에서 장합을 맞서 싸웠던 마속의 대패로 실패로 끝났습니다. 제갈량은 일단 한중으로 돌아가서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당시 옹주방어를 맡고 있던 조진은 학소에게 명하여 장안으로 가는 길목인 진창을 지키게 합니다.
- 주요 출전장수 촉: 제갈량 위: 조진, 학소, 비요, 왕쌍
- 결과: 군량이 떨어진 제갈량의 철수, 위나라 장군 왕쌍 전사
- 정사의 기록을 번역해드리겠습니다.
[제갈량전] (228년) 겨울, 제갈량은 재차 산관(散關)을 나와 진창(陳倉)을 포위했는데, 조진이 이것을 막았으며, (229년 초) 제갈량은 식량이 다 떨어졌으므로 돌아왔다.
[명제기] (228년) 12월, 제갈양이 진창을 포위하였으므로, 조진은 장군 비요 등을 파견하여 그와 싸우게 했다.
[조진전] 조진은 제갈량이 기산에서의 실패로 교훈을 얻었으므로, 지금 이후 병사를 내보낼 때는 반드시 진창을 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군 학소(학昭)와 왕생(王生)을 미리 보내 진창을 지키며, 그 성벽을 수리하고 쌓도록 했다.
[위략에 이르기를, 학소는 자를 백도라 하며 태원군 사람이다. 제갈량은 진창에서 학소를 포위하자 학소의 동향사람 근상을 시켜 성벽 밖에서 학소를 설득시켰으나 "나는 그대를 알고 있으나 (화)살은 그대를 모르오."라고 했으므로 근상은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밤낮을 이은 공방전이 20일 남짓하자 제갈량은 취할 방법이 없어졌고 구원군이 도착했으므로 군대를 물려 철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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