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
진수(陳壽 233년~297년)는 삼국지의 저자이자 중국 서진 시대의 역사가이다. 자는 승조(承祚)로 파서(巴西)군 안한(安漢)현 사람이다. 일설에는 촉의 장수 진식(陳式)의 후예라고도 하지만 근거가 없다. 조카로 형의 아들인 진부(陳符), 진이(陳莅)와 동생의 아들인 진계(陳階)가 있다.
처음에는 초주(譙周)에게 사사받았으며 촉한에서 임관했으나 황호(黄皓)를 거스르는 바람에 좌천되었다. 여기에 부친의 상으로 복상 중일 때 병에 걸려 하녀에게 환약을 만들게 한 것이 발각되어 불효자로 규탄을 받았는데 이는 유교에서 부모의 상일 때는 몸을 돌보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촉한이 멸망한 후에도 한동안 관직에 오를 수가 없었다.
이후 이전의 동료였던 나헌(羅憲)의 추천으로 서진에 출사했으며 서진의 무제(사마염)에게 그 재능을 인정 받아 익주 지방의 역사인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이나 촉한의 승상이었던 제갈량의 문서집인 '제갈량집(諸葛亮集)'을 편찬하여 장화(張華)등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삼국지(三國志)를 편찬했는데 장화는 이를 보고 '진서(晉書)는 이 책에 이어가야 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순욱(荀勗 삼국시대의 순욱과는 다른 사람)은 진수를 역사가로는 높게 평가했으나 삼국지의 위서(魏書) 부분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진수를 외지에 있는 장광 태수(張廣 太守)로 임명했다. 진수는 이를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사퇴했으나 그간의 경위를 알게된 두예(杜預)의 추천으로 검찰 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되었다.
모친(화양국지에 의하면 계모)이 낙양에서 죽자 유언에 따라 낙양에 매장했다. 그런데 고향의 분묘에 매장해야 하는 당시의 관습에 어긋났기 때문에 다시 불효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관직에서 파면 당했다. 수년 후에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에 임명되었으나 명을 받들지 않은 채 죽었다.
하지만 진수 본인에 대해서는 삼국지를 쓸 당시 사사로운 원한에 따라 사실이 아닌 왜곡된 글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예를 들어 위나라 정의(丁儀)의 자손들에게 '당신의 아버지를 내가 쓰고 있는 역사서에서 높게 평가하려 하는데 그 댓가로 쌀 천석을 받고 싶다'라고 원고료를 요구했고 이를 거절 당하자 그의 전기는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 제갈량이 자신의 아버지를 처벌했고 자신이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諸葛瞻)에게 무시당한 것을 원망하여 제갈량의 전기에서 제갈량을 낮게 평가하고 제갈첨을 '서화에만 관심이 있고 실제 능력에 비해 명성이 과장되었다'며 낮추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정사 진서(晋書)에 수록된 일화이지만 정의의 일족이 조비에게 주살당하여 자손의 존재유무가 의심스럽다는 점이 있다. 또한 진수가 제갈량의 군사 능력에는 의문을 나타냈지만 정치가로서의 재능을 높게 평가한 것 등 종합적인 평가는 절찬에 가까운 부분이 있다.
오히려 진서는 역사서로서 평가가 낮은 편인데 진서에는 소문에 가까운 설까지 받아들여 구성되었기 때문에 공정하다고 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진수에 대한 이러한 악평은 340년에 완성된 왕은(王隠)의 진서(晋書) 등에도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일찍부터 퍼져 있던 것으로 보여진다.(정사 진서는 648년 경에 완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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