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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라 & へ山行
Study/Camera

접사의 묘취(妙趣)

by 유리의 세상 2009. 1. 19.

 

 

 

접사의 묘취(妙趣)

 

 

 

 

 

 접사의 묘취(妙趣)

어제 내린 비로 초록이 더욱 짙다. 하룻밤 새 한 뼘씩이나 더 자란 풀잎에는 채 마르지 않은 빗물이 반짝인다. 절대적인 자연 앞에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지만 이름도 모른 채 지나쳤던 길가의 풀들과 나무. 들녘을 수놓고 있는 각양각색의 꽃들. 미물이라 하찮게 여겼던 작은 곤충들.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이 자연의 일부이며 나에겐 귀중한 피사체가 된다. 그들과 우주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한껏 부풀어오른다.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강이나 산, 들이나 수목원 등지에서 거의 하루를 보내곤 한다. 그것은 카메라 렌즈를 통한 접사(接寫)의 묘미를 알면서 부터다. 처음 접사를 시도했을 때의 기분이란 지금 생각해도 무어라 형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 반 셔터를 누른 상태로 들여다 본 파인더 안의 세계는 그야말로 황홀경이었다. 아웃 포커스 현상으로 흐려진 주위 배경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피사체는 마치 날 보라는 듯이 활짝 웃는다. 줌잉(Zooming)을 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속살. 파르르 떨며 입김을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꽃가루들. 작은 곤충들은 내 존재를 잊고 꿀을 빨거나 노는 모습이 신비롭기만 하다. 넋을 잃은 채 그들 속으로 마음을 풀어놓다 보면 어느 땐 접사한 것이 렌즈 속의 이미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눈이며 마음이라는 생각에 작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행여 초점거리를 벗어날까 두려워 손끝은 떨린다. '여인의 젖가슴을 만지듯 살짝 눌러 찍은 피사체가 환한 웃음으로 나타날 때의 짜릿함을 그대들은 느껴보았는가' 라며 아무에게나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자 그도 역시, 첫사랑 그 님의 환한 미소에 버금갈 정도라며 까르르 웃는다.
그렇게 피사체와 교감이 흐르는 느낌을 받으면 어느새 나의 인생 전체가 아름답게 다시 피어나는 것만 같다. 비록 접사의 묘미를 알기 시작한 시기가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배냇짓할 시기정도만큼 짧지만, 제법 전문가 흉내를 내고있노라면 우리조상 누군가의 예술혼이 내게도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그럴 듯한 착각까지 들곤 하는 것이다.

언젠가, 둑길에 널브러진 작은 꽃들을 접사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골몰하고 있을 때다. 지나는 행인 몇 몇이 몰려들더니 사진작가냐고 물었다. 삼각대를 폈다 접었다, 앉았다 일어섰다 별 요상한 포즈를 다 취하고 있으니 단순한 취미생활 차원이 아니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애써 태연을 가장했지만 피사체가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몰려선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렌즈에 포착된 작은 꽃술들이 흘린 노란 꽃가루를 보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 조작법조차 온전히 익히지 못한 완전 초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할 수도 있다는….
내가 작은 꽃들을 접사하듯 누군가도 나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이처럼 선의든 악의든 거짓마음을 품고있는 어눌한 인간의 심상도 피사체를 통해 보는 심도의 차와 흡사하지 않을까 싶었다.
삼각대를 서둘러 접고 가벼운 미소로 겸연쩍은 마음을 대신하곤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런 나의 등뒤에서 누군가 접사렌즈를 들이대고 있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웃지 못할 상상까지 해 보았던 기억이 난다.
육안으로 볼 수 없던 미세한 부분까지 찍어내는 접사렌즈를 본 따, '他人의 마음속 들어가기'라는 명명 하에 우리스스로를 얽어매기 위한 수단의 기기가 누군가에 의해 발명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새로운 덫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바동댈 내 작은 몸짓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한마디의 설명이면 될 일도 남들의 과대상상을 오히려 포장 삼아 위장의 탈을 쓰고 대하려 드는 사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려하기 보다는 나 하나만 잘 되면 그만 이라는 생각에, 결국 다른 한쪽을 내 쪽에 가두어 두거나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욕심만 부풀리게 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에 미치고 보면 결코 '他人의 마음속 들어가기'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신종 기기의 출현을 상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싶다. 신의 창작물 중 으뜸이라는 인간복제까지도 가능한 시대가 아니던가.

요즘처럼 자연 속에 머물다보니 무위로 흐르는 듯한 그들의 세계에도 질서가 있고 그들 나름의 엄격한 규칙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우주 공간의 핵을 이루는 자연, 그 속에 한 점되어 노닐다보면 모든 생물체엔 나름대로의 존재의미가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몸짓을 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누가 해치려 들지 않는 한 피하거나 달아나려 하지 않는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해하기보다는 서로의 향기와 의연함으로 교감하며 우주적 흐름에 순응하는 자연, 나는 그들 속에서 진지한 삶을 배우려 한다.
그 뿐이랴. 하찮게 보아왔던 작은 돌이나, 생명을 다하고 누워있는 고목이라 할 지라도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귀하게 또는 신비롭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거시적(巨視的)인 안목으로 스치듯 지나던 모든 것들이 미시적(微視的)인 아름다움으로 나타났을 때의 환희, 그 속에 나는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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