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이야기
김삿갓(1)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1807-1863)이다. 강원도 영월 사람이며 당시의 명문 대가 안동 김씨이다. 김병연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0세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였고 시서와 사서를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특히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 모르는 글이 없었다. 병연은 본시 글공부만 좋아했지 공명심이나 출세욕 같은 데는 별로 관심이 없어 과거에도 응하지 않고 있었다. 때는 1826년(순조 32년)으로 조선의 국운은 이미 서산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으며 각지에서는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 매관매직이 노골적이고 돈과 빽이 없는 사람은 능력이 있어도 관가에 나갈 수 없는 시절이었다. 어머니 이씨는 자식의 능력이 아깝고, 안타까워 영월 고을에 백일장을 보인다는 소문을 듣고 간곡하게 응시해 보도록 부탁한다. "백일장은 과거와 달라 장원급제를 해도 벼슬을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런 시험을 무엇 하러 봅니까?" "네 학문이 어느 정도인지 이 애미는 알고 싶어 그런다."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병연은 백일장에 응시한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가산 군수 정시는 문관이면서도 반란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는데 선천 방어사 김익순은 무관이면서도 반란군에게 즉석에서 항복해 버렸다. 그런 까닭에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하고 난 뒤 김익순을 역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참형에 처해 버렸다. 그 당시 그와 같은 사건이 있었는데 이 날 백일장의 시제는 그 사실(史實)을 갖고 시를 지어 올리라는 것이었다. 병연은 그 시제를 보는 순간 형용하기 어려운 충격심이 솟구쳐 올랐다. 평소에도 김익순을 백 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왔기 때문이다. 붓을 들기 무섭게 역적 김익순의 죄상을 탄핵하는 병연의 필봉은 추상같이 준엄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려워 쩔쩔매고 답안지 작성을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병연은 벌써 다 쓰고 나왔다. 오는 길에 주막집에 앉아서 술을 먹고 있는데 사람들이 떠들며 들이 닥쳤다. "낙방했으니 홧김에 술이나 한 잔 하세."
"백일장 결과가 발표되었습니까, 어떤 사람이 장원급제했습니까?" "뭐, 김병연이라고 하던가요. 전연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장원을 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오." 병연은 벌떡 일어났다. 빨리 집에 가서 어머니와 아내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아이구, 내 아들아! 네가 기어코 장원을 해내고야 말았구나. 세상에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옆에 있던 병연의 아내도 기쁨을 감추지 못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여보, 서울 가서 과거를 보면 틀림없이 장원급제할 거예요." "어머니, 오늘 저는 운이 참 좋습니다. 제가 제일 경멸하는 역적 김익순이에 대해서 쓰라는 문제가 나왔기 때문에 옳다 너 이놈 잘 만났다 싶어 뼈도 못 추릴 만큼 신랄하게 두들겨 팼습니다." "뭐, 김익순?..........." 그 말을 들은 어머니 이씨 부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에 쓰러져 버린다. 병연 내외는 기겁을 하게 놀라며 얼굴에 물을 뿌리고 한참 동안 법석을 떨었다. 한참 후, 이씨 부인은 한숨을 쉬며 간신히 눈을 떴다. 그리고 병연을 쏘아보며 대갈일성을 퍼부었다. "이놈아, 선천 방어사 김익순 어른은 너의 조부님이시다. 너의 조부님이 아무리 국가의 죄인이셨기로 조부님의 함자를 함부로 불러 던지는 후레자식이 어디 있단 말이냐!"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아니! 할아버지라니.........." "홍경래의 무리들이 들이닥친 그 날 밤 너의 조부님은 술에 대취해 정신없이 주무시고 계시다가 어처구니없이 포로가 되셨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당시 정황을 참작하여 김익순만 참형에 처하고 삼족을 멸하지 말라는 특별 은총이 내렸다. 그때 아버지 김안근은 젊은 나이에 울화병으로 일찍 죽었다. 어머니 이씨는 자식들만은 제대로 키우기 위해 황해도 곡산에 숨어살다가 역적의 자손이라는 것이 들통 나자, 광주, 가평, 평창, 여주 등지로 전전하다가 영월 산 속으로 들어와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역적의 손자다. 조상에게조차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으니 무슨 낯짝으로 살아갈 것인가.” 병연은 죽고 싶은 충동이 절실하였다. 매일 자책과 통한으로 방황하였다. 그래서 하늘을 보기가 부끄러워 한평생 삿갓을 쓰기로 했다. 가족과의 인연과 모든 욕망을 포기해 버리고 속죄를 하기 위해 한 조각 구름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기로 하였다. 김병연이란 이름도 버렸다. 자기 자신에게 내린 가혹한 형벌이었다. 가족들과 인연을 끊고 한평생을 방랑객으로 유리걸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고 병연은 마음을 굳게 먹고 집을 나온다.
명판결
금강산을 삼면으로 에워싸고 있는 회양군, 고성군, 통천군 세 고을은 거대한 태백산맥의 등줄기에 해당하는 곳으로 산세가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지대다. 김삿갓은 금강산의 턱밑인 회양군에 도착했다. 회양 군수 이범호는 영월 백일장에서 김삿갓이 장원할 때 차석을 한 사람이다. 그는 다시 서울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여 얼마 전에 이 고을에 사또로 부임해 왔다. 지나가는 길에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들어갔다. "선생께서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한 그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후 운수객(雲水客)으로 세상 유람하러 다니신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범호는 반가이 맞는다. 본의 아니게 조부를 매도한 시로 조선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 김삿갓은 씁쓸할 뿐이다. "노독을 푸실 겸 단 며칠 동안만이라도 저의 고을에서 쉬어 가십시오. 그리고 미거한 저를 위해 치도에 관한 지식을 꼭 좀 하교해 주시고 가십시오." 하며 술상을 내오라고 이른다. "방랑객에 불과한 나 같은 놈에게 치도를 물어 보신다는 것은 당치 않는 말씀입니다." "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을.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하신 시문 속에는 선생의 고매하신 치도 정신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김삿갓은 그놈의 시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회양 고을에는 지금 매우 판단하기 어려운 소송사건이 하나 생겼다. 어떤 사람이 불에 타 죽었는데 그 집 마누라의 말에 의하면 집에 불이 나서 남편은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친척들은 마누라가 남편을 죽인 뒤에 집에 불을 놓아 시체를 태워 버렸다고 주장하며 사또에게 진상을 규명해 달라고 고소를 제기해 왔다. "염탐꾼들을 풀어 그 여인의 소행을 소상하게 알아본 즉, 그들 부부는 평소에 금슬이 매우 나빴고 여인은 성품이 간악하기 이를 데 없다 합니다. 그래서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 고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김삿갓은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떡이며 웃는다. 사또는 김삿갓의 심상치 않는 태도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한다. "오늘 술값은 해야지요. 사또 어른을 명관으로 만들기 위해 비방을 가르쳐 드려야만 하겠군요." 김삿갓은 그와 같은 농담을 던지고 사또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를 속삭인다. 사또는 그 말을 듣고 화색이 밝아지며 크게 감탄한다. 사또는 동헌 마당에 문제의 여인을 꿇어앉혀 놓고 많은 방청객들이 보는데서 공개재판을 하였다. 그런데 죄수 옆에는 난데없는 돼지 두 마리가 결박되어 꿀꿀거리고 있었다. "사또께서는 어디다 근거를 두고 쇤네를 살인범으로 몰아치는 것이옵니까? 죄가 있다면 증거를 보여 주시옵소서. 생사람을 살인범으로 몰아치는 법이 어디 있사옵니까?" 여인은 길길이 날뛰며 정면으로 대든다. 사또는 대답한다. "살아있는 사람이 불에 타 죽었을 때는 입안에 재가 가득하게 쌓이게 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불에 탔을 경우에는 입안이 깨끗한 법이다. 그래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돼지 한 마리는 살아 있는 대로 불에 태워 죽여보고, 다른 한 마리는 이 자리에서 죽여 가지고 불에 태워 보기로 하겠다." 방청객들은 모두들 탄복해 마지않는다. 그리하여 동헌 마당에는 방청객들이 보는 앞에서 한 마리의 살아 있는 돼지와 한 마리의 죽은 돼지를 불에 태운다. 이윽고 두 마리의 돼지가 완전히 불에 타고나자 살아서 불에 타 죽은 돼지의 입안에서는 재가 시꺼멓게 쌓여 있지만 죽은 뒤에 불에 탄 돼지의 입안에서는 재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죽은 사람의 입을 벌려 보니 시체의 입안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입안처럼 깨끗하지 않은가. 방청객들은 긴가민가하고 있다가, "저 사람은 저 년의 손에 죽은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세상에 제 서방을 불에 태워 죽이는 계집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또 역시 새삼스러이 분노를 금치 못하여 죄수에게 다그쳐 말한다. "죄수는 듣거라. 이렇게 증거가 뚜렷한 데도 자백을 못하겠느냐!" 죄수는 더 이상 무죄를 고집할 수 없는지 별안간 땅에 푹 엎어지더니 소리 없이 울기만 할 뿐이다. 방청객들은 저희들끼리 죽일 년, 살릴 년하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우리 고을 사또님은 천고에 없는 명관이시다." 하며 새삼 감탄한다. 사또가 최후의 판결을 내리고 관사에 들어와 김삿갓에게 술을 권하며, "오늘 제가 천고에 없는 명관이라는 칭송을 듣게 된 것은 다 선생 덕분입니다. 금강산에 들어가기를 단념하시고 우리 고을에 길이 머물러 주신다면 저로서는 더 이상 고마울 일이 없겠습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며칠 동안 술이나 더 얻어먹다가 가게 해 주십시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며칠 뒤 아무도 모르게 바랑을 둘러메고 관사를 나왔다. 그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아 오다가 고별인사도 없이 떠나는 것이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이런 길이 아니었던가.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산천초목이 자기를 새삼스러이 반갑게 맞아 주는 것만 같았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이 그렇게도 즐거울 수가 없었다. 어느새 봄이 깊어 산 속에는 가는 곳마다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사람들은 꽃을 볼 땐 빛깔을 보나 나는 홀로 향기마저 좋아하노라 좋은 향기 하늘땅에 가득히 차면 나도 또한 한 떨기 화초인 것을
회갑 축시
김삿갓은 하루 종일 걷다가 땅거미가 져갈 무렵에 고갯길을 넘어오다 보니 저만큼 산기슭에 오막살이가 하나 있다. 김삿갓은 그 집을 찾아가 하룻밤 신세를 부탁하니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이 바로 고개 넘어 김 참봉 댁 회갑 날이오. 그 집에서는 소까지 잡았으니까 거기 가면 진수성찬을 배가 터지도록 얻어 자실 수 있을 것이오." 김삿갓은 말만 들어도 입에 군침이 돌 지경이었다. 오랫동안 굶다 얻어먹다 하다가 오늘이야말로 술과 고기를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김 참봉 댁에는 술좌석이 여기저기에 푸짐하게 벌어져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과객이올시다. 이 좋은 잔치에 나도 한몫 끼어 보고 싶군요." 김삿갓은 염치불구하고 한몫 끼어 들려 하였다. 그러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김삿갓의 초라한 몰골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단숨에 퇴짜를 놓았다. "이 자리는 점잖은 분들을 모시는 좌석이니 다른 좌석으로 가 보시오." 김삿갓은 은근히 부아가 동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 좌석으로 찾아가 똑같은 부탁을 해 보았다. "여기는 당신이 동석할 자리가 아니오. 다른 데로 가 보시오." 김삿갓은 분통이 터졌다. "여보시오들! 회갑 잔치 때는 지나가던 거지도 융숭하게 대접해 보내는 법인데 이런 인사가 어디 있단 말이오." "아니 당신은 남의 잔치 집에 와서 시비를 걸려는 것이오?" 하고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늙은이가 옆에 놓여 있는 삿갓을 몇 번이고 눈여겨보더니, "아니, 저 어른은 삿갓선생이 아니시오이까?" "뭐, 삿갓선생?" "이 사람들아! 그 옛날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급제를 하신 그 분 말일세. 자네들은 그 분의 시를 천하의 명시라고 노상 감탄해 오고 있지 않은가?" "엣? 저 분이 바로 그 시를 지으신 어른이시란 말인가?" 마당 안의 사람들은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모두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김 참봉도 김삿갓에게 정중히 술잔을 올리며 말한다. "고귀하신 어른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노생(老生)으로서는 다시없는 영광이오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다투어 술을 권하기 시작하였다. 김삿갓은 오랫동안 술에 굶주렸던 판인지라 한 잔도 사양하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그리하여 취흥이 도도하여 왔을 때, 김 참봉은 아들 7형제를 모두 불러내어 일일이 인사시켰다. "오늘은 노생의 회갑 날이옵니다. 선생은 우리 가문을 위해 축시 한 수를 휘호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 집에서는 두고두고 가보로 삼겠습니다." 김삿갓 자신도 그렇게까지 귀객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다. 이윽고 김삿갓은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첫 구절을 써 갈기는데 아까 무시당했던 것이 콱 솟구쳤다. 저기 앉아 있는 저 노인은 사람 같지가 않구나 彼坐老人不似人 너무도 모욕적인 문구여서 좌중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김 참봉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아들 7형제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사람 같지 않다니? 그렇다면 짐승 같다는 말인가?" 막내아들이 주먹을 움켜쥐며, "여보시오, 당신 죽고 싶어 환장을 했소?" 하고 덤벼들 듯이 나온다. "허어.......젊은 양반이 성미가 왜 그리 급하오. 다음 구절을 두고 보시오."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오신 것만 같구나 疑是天下降神仙 두 번째의 구절을 보고 난 노인들은 감탄을 마지않는다. "그렇지! 신선이니까 사람일 수가 없는 일이지." "글이란 참으로 절묘한 것이로구나. 삿갓선생이야 말로 시에 있어서는 귀신같으신 분이네." 모욕감에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던 김 참봉 자신도, 일약 신선으로 둔갑하는 바람에 입이 찢어지도록 기뻤다. 그리고 7형제의 얼굴에도 환희의 빛이 넘쳐 올랐다. 김삿갓은 알은 체도 안하고, 슬하의 일곱 아들은 모두가 도둑놈들이네 膝下七子皆爲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이 좋은 잔칫날에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모조리 도둑놈으로 몰아 버리는 데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모처럼 환희에 넘쳤던 분위기가 또다시 송두리째 뒤집히고 말았다. 7형제의 얼굴에는 또다시 불쾌감이 넘쳐 올랐다. 동석한 노인들도 모두 불안스러워 하였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일은 아랑곳 않고 거기서 일단 붓을 놓는다. 그리고 주인아들 7형제를 하나씩 둘러보며 이렇게 말한다. "목이 컬컬하니 나 술 한잔 주려오. 마지막 구절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한 잔 마셔가며 좀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소." 그야말로 사람을 마음대로 주물러대는 수작이었다. 아들들은 모두 돌아가며 술을 한 잔씩 부으며 말한다. "선생님, 마지막 결구만은 부디 좋게 써 주십시오." "허허허, 부처님의 코가 높고 낮기는 석수쟁이의 손에 달려 있소." 은연 중의 엄포였다. 김 참봉까지 와서 안절부절못하며 새 주전자의 술을 정중히 한 잔 붓는다. 김삿갓은 술을 마실 만큼 마시고 나서 다시 붓을 잡았다. 흥청망청하던 회갑연은 무거운 침묵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의 시선은 김삿갓의 붓 끝에 집중되어 있었다. 드디어 붓에 먹을 듬뿍 찍고 써내려가고 있었다. 하늘에서 복숭아를 훔쳐다가 수연을 올리는구나 偸得天挑獻壽宴 <천도는 하늘에만 있는 복숭아로서 이것을 먹으면 2천년을 산다는 전설이 있다.> 김삿갓이 마지막 구절을 휘갈기고 붓을 던져 버리자 좌중에서는 환호성이 폭발하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금 전까지도 도둑놈 취급을 받아 오던 7형제가 순식간에 효자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장수를 위해 하늘에서 복숭아까지 훔쳐 올 정도라면 세상에 그런 효자가 어디 있으랴. 그야말로 천변만화의 신기(神技)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글재주였다. 김삿갓의 재치와 천재성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김삿갓은 축시를 한 수 써준 덕택에 김 참봉 댁에서 10여 일 동안이나 주지육림 속에서 살아올 수 있었다. 어느 날 조반 후 주인이 없는 틈을 타 바랑을 둘러메고 표연히 방랑길에 올랐다. 인사를 정식으로 나누고 떠나려면 수속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떠날 때는 언제나 말없이 떠나는 것이 그의 습성이었다.
거짓 족보
1 강원도 정선의 한 산골이다.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었다. 김삿갓은 어디 잠자리를 찾던 중, 서당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니 10여 명의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었고 늙은 훈장이 아랫목에 앉아 위엄을 떨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오?" "금강산 구경 가는 길입니다." "글은 좀 읽었소?" "네, 사서삼경 정도 읽었습니다." "네? 사서삼경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이 하나가 선생님 이게 무슨 글입니까 하고 묻는다. 훈장은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하다가 말했다. "내가 돋보기가 없어서 글자가 보이지 않는구나. 내일 가르쳐 줄게." 김삿갓이 보니 별로 어려운 글자도 아니었다. 훈장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날 저녁은 거기서 하루 신세지기로 하고 자리에 누웠는데 아까 글 읽던 아이 하나가 찾아 왔다. "무얼 좀 물어보러 왔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보니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글자풀이를 좀 해주십사 하고요." "너의 선생님한테 물어 보면 될게 아니냐." "우리 선생님은 글이 짧으셔서 물어봐도 모릅니다. 아까 선생님하고 하는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난들 아느냐. 보기나 하자." 하고 보니 하얀 한지에 '籍'자 한자만 적혀있다. "아무리 보아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소년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쉰다. "이 편지에 제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운명이? 그게 무슨 소리냐?"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소년은 산 너머 마을에 현 진사 댁 고명딸인 보옥이라는 처녀를 혼자 사모해 왔는데 얼굴도 아름답거니와 학식도 대단하였다. 몇 달 전부터 그 집 계집종을 매수하여 그 처녀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닷새에 한 번씩 열 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이 '籍'자 한자뿐이라 한다. 그 말을 들은 김삿갓은 ‘籍’자를 한참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빙그레 웃는다. "이 부근에 혹시 대나무 밭이 있느냐?" "네, 있습니다. 현 진사 댁 뒷동산에 무성한 대나무 밭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무 하룻날 대나무 밭에서 만나자는 말이다." "어떻게 아세요?" "籍자를 파자하면 竹 來 十十 一 日 이 된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스무 하룻날 대나무 밭으로 오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 다음날 아침에 김삿갓이 자고 있는데 소년의 아버지인 조 풍헌이라는 영감이 찾아 왔다. "선생께서 우리 집 아이가 현 진사 댁 규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세상에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풍헌 영감은 현 진사 댁 규수를 며느리로 맞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양반과 상사람의 한계를 극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의 집에 간단한 조반상을 준비했으니 가십시다." 김삿갓은 풍헌 영감과 같이 집에 가보니 산해진미가 가득하였다. "아무것도 차린 것이 없습니다만 많이 잡수십시요." "차린 것도 없으면서 무엇을 먹으라는 말씀입니까. 차린 것도 없다고 하셨으니 내게는 술이나 한 잔 주면 고맙겠습니다." 풍헌 영감은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하인들을 꾸짖는다. "여봐라, 술은 안 내오고 무엇하고 있느냐?" 며칠 후. "선생님 덕분에 현 낭자를 기쁘게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뜻대로 되었느냐?" "네, 자기는 글자 한자만 써 주었는데 글자풀이를 누가 해 주었느냐고 물어봐서 내가 3일 동안 끙끙 앓으면서 사연을 알아냈다 하니 낭자는 기뻐했습니다." "그래, 본인한테 직접 구혼이라도 해 보았느냐?" "그 비슷한 말을 해 보았습니다만 양가 부모님의 승낙을 받기 전에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올해가 현 진사의 환갑이어서 준비도 있고 하니 앞으로는 만날 수가 없고 부모님을 통해서 청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풍헌 영감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기 아깝고 안타까워서 몸이 바짝 달았다. 대책 없이 김삿갓만 붙잡고 늘어진다. "삿갓선생, 기왕에 도와주시는 길에 끝까지 도와주십시오." 하며 옷소매를 힘차게 잡아당긴다. 김삿갓은 조용히 생각하며 작전을 짠다. 2 현 진사는 명문가의 후예지만 몰락한 양반이다. 제 아무리 조상이 훌륭해도 돈이 없으면 행세를 못하는 세상이다. 풍헌 영감은 양반은 못되어도 돈은 많지 않은가. "저쪽이 우참찬의 후예라고 했으니 이쪽은 영의정의 후예라고 합시다." "삿갓선생은 누구를 감옥으로 보내려고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하십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일 송아지 한 마리 몰고 갑시다." 현 진사 댁 대문 앞에 가서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시골에는 없는 풍습이었다. 서울 양반의 위엄을 보여 줌으로서 현 진사의 기를 꺾어 놓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저는 서울서 내려온 안동 김씨 김삿갓입니다. 저의 집안과는 한 집안이어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안동 김씨라면 서울에서도 명문대가인데 생면부지의 나그네가 한 집안이라니....... 현 진사는 의아했다. "저의 5대조 고모님이 현씨 가문에 출가를 하셨습니다. 서울서는 두 가문이 한 집안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서울 이야기만 나오면 심리적으로 기가 죽어버린다. "진사 어른, 이분은 산 너머 마을에 사는 조 풍헌 영감님인데 제게는 외숙뻘 됩니다." 안동 김씨라는 양반이 상사람인 조 풍헌을 외숙이라고 부르는 데는 현 진사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세조 대왕 때 영의정 벼슬을 지낸 조영무 대감의 후손입니다." 현 진사는 그 말에 또 한번 놀랐다. "풍헌 영감님의 5대조께서 이곳 정선으로 낙향하여 사셨는데 집이 몹시 가난하여 쌀 천 석에 양반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때부터 풍헌 영감님 댁은 평민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사 어른의 회갑 날이 멀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 잔치에 쓰시도록 송아지를 한 마리 몰고 왔습니다." 현 진사는 너무도 놀랐다. 기쁨에 넘친 놀라움이었다. "풍헌 영감님이 그토록 훌륭하신 분임을 모르고 우리가 오늘날까지 너무 소원하게 지냈습니다." 이제는 현 진사의 말투가 매우 정중해졌다. 이윽고 술자리의 취흥이 도도해 오자 풍헌 영감을 눈짓으로 자리를 뜨게 한다. "풍헌 영감님은 돈도 많고 아드님도 명민하여 매우 다복한 분입니다. 그런데 남모르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슨 걱정인가요?" 현 진사는 자기도 모르게 김삿갓이 던진 낚싯밥에 걸려들었다. "진작부터 장가를 보내려고 하지만 마땅한 혼처가 나타나지 않아 무척 고민 중인 모양입니다." 현 진사는 그런 말을 듣자 자기 딸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내 집에도 시집보내야 할 딸이 있는데 시골에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짐짓 놀라 보였다. "옛? 댁에도 혼기의 규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중신 애비로 나서 보면 어떻겠습니까?" 현 진사는 그렇잖아도 딸의 혼사 문제로 은근히 골머리를 앓아오던 터에 신랑만 똑똑하다면 굳이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석양 무렵에 풍헌 영감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삿갓의 수완에 탄복해마지 않는다. "내가 영의정의 후손이라니. 세상에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로부터 닷새 후에 김삿갓이 혼자 집을 나서자 풍헌 영감은 황급히 묻는다. "선생은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오늘은 현 진사를 찾아가서 매듭을 짓고 오겠습니다." 김삿갓은 굶기를 밥 먹 듯하다가 연일 술과 고기만 먹어온 덕분인지 산길을 걷자니 다리가 뿌듯하다. "풍헌 영감님은 생각이 많으신 모양이지만 제가 가까스로 설득하여 확답을 받아 놓았습니다. 이제 현 진사 어른의 승낙만 있을 뿐입니다." "글쎄올시다. 가문도 분명치 않고....... 우리 집 딸아이는 <사서삼경>까지 통독했는데 풍헌 영감님 자제는 이제 겨우 <사략>을 읽은 정도던데요."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간 김삿갓은 여기서 승부수를 던진다. "댁의 따님과 풍헌 영감님의 아드님은 오래 전부터 밀회를 해오고 있는 사이랍니다. 만약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아무도 며느리로 데려갈 사람 없습니다. 진사 어른께서 반대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나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일어서려는데 현 진사는 크게 당황한 빛을 보이며 김삿갓의 소매를 창황히 붙잡는다. "잠깐만......." 딸아이를 불러 물어보니 사실이란다. 김삿갓의 폭탄선언이 현 진사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실상인즉 현 진사도 이 혼사에 대해 노상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조 풍헌이 정선 고을에서는 소문난 부자라는 것이다. "삿갓 선생, 본인들끼리 그렇게 되었다면 천생연분입니다. 삿갓 선생이 원만하게 결합될 수 있도록 노력을 좀 해 주십시오." 이날 저물녘에 김삿갓은 개선장군과 같은 기분으로 돌아오니 풍헌 영감은 눈알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다가 다급하게 물어본다. "삿갓선생,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이제 사주단자만 보내면 됩니다." "삿갓선생, 우리 가문에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의 은공을 일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말씀은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 주시죠." 김삿갓은 술이나 한 잔 얻어먹으면 그만이었다. 보수를 바라고 중신 애비로 나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혼례식이 끝날 때까지 아무데도 가시지 마시고 우리 집 대사를 끝까지 돌봐 주셔야겠습니다." 이날 밤 김삿갓은 풍헌 영감과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에 옷을 추려 입기 무섭게 죽장망혜로 정처 없는 행운유수의 방랑길을 떠난다.
비운의 세 자매
김삿갓이 저녁을 얻어먹고 잘만한 곳을 찾느라고 어두운 산 속을 걸어 가고 있는데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오막살이의 문을 두드려 보니 70넘은 노파가 혼자 살고 있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올시다.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싶은데 재워주실 수 있을는지요?" "우리 집은 나 혼자 사는 집이라우. 건넌방에서 자고 가시우." 한다. 김삿갓은 건넌방이고 뭐고 가릴 처지가 되지 않아 염치불구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감자 삶은 것을 몇 개 얻어먹고 방 안을 둘러보니 낡은 문갑 위에 ‘명심보감’이라는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쓰러져 가는 초가삼간이지만 노파는 어딘가 모르게 기품이 있어 보이고 곱게 늙어 보였다. 노파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 보니 이 할머니는 뜻밖에도 첫날밤에 소박을 맞았단다. 자기의 두 언니도. 세 자매가 모두 첫날 밤에 소박을 맞은 것이다.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모든 것은 아버님의 산소를 잘못 쓴 탓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아버님의 산소는 누에의 머리라는 잠두(蠶頭) 형국이라 하더군요. 잠두 형국에 산소를 모실 때는 산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뽕나무를 심어놔야 하는데 그놈의 돌팔이 지관이 잠두 형국이 명당이라는 것만 알았지 뽕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은 몰랐거든요. 그래서 우리 세 자매는 모두 불행하게 됐지요." 서울의 목멱산(남산)도 풍수지리학 상으로는 잠두 형국에 속한다. 그래서 이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해 오자 남산에서 바라다 보이는 곳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그곳이 지금의 잠실과 잠원동이다. 이 할머니의 아버지는 한양에서 높은 벼슬을 하다 이 산골에 유배를 왔다가 죽었다. 그 뒤 어머니는 세 딸을 엄격한 가정교육과 양가집 규수로서 손색없는 여자로 키웠다. 첫째 딸은 그 지방의 부잣집 아들과 혼례를 치렀다. 첫날밤에 신랑이 신부의 옷을 벗기려 하자 기절초풍할 듯이 놀라며 옷 벗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평소에 남자를 함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어머니로부터 철저히 받아왔기 때문이다. 부부는 한 집안에서 그저 같이 사는 줄로만 생각해 왔던 것이다. 신랑은, "너 같은 계집과는 죽어도 안 살겠다." 하고 신새벽에 집으로 달아나 버렸다. 맏딸이 첫날밤에 소박을 맞게 되자 어머니는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둘째 딸이 신방을 치르게 되었을 때 남녀 간의 육체관계에 대한 예비지식을 자세하게 일러 주었다. 그녀는 성격이 말괄량이 같은지라 첫날밤에 자기 손으로 옷을 활활 벗어버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신랑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옷을 벗었으니 신랑님도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오세요." 자기 딴에는 소박을 맞지 않으려고 선수를 친 것이다. "전에도 남자들하고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자 본 경험이 많은 모양이지." 신랑은 그 한마디를 내던지고 부랴부랴 두루마기를 주워 입기 무섭게 달아나 버렸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포복절도하였다. 셋째 딸인 이 할머니가 혼례식을 올리게 된 것은 18세 때의 일이었다. 언니들처럼 첫날밤에 소박을 맞을까 두려워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래서 신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신랑에게 간신히 물어보았다. "제 옷을 제가 직접 벗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신랑님께서 벗겨 주시겠습니까?" 신랑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입을 딱 벌린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계집년이 얼마나 많이 놀아먹었으면 그 꼴이야!" 하고 한마디를 외치더니 쏜살같이 밖으로 달아나 버리더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김삿갓은 또다시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노파의 두 언니는 모두 죽고 이제는 북망산천 갈 날만 기다린다며 그녀도 서글프게 웃었다. "남들도 첫날밤에 소박맞은 일이 더러 있기는 한가요?" "있다 뿐인가요. 그런 사건은 어느 지방에서나 흔히 있는 일인 걸요. 내가 돌아다니면서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어떤 신부가 첫날밤에 신랑과 잠자리를 같이 했을 때 신부가 자꾸 엉덩이를 움직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랑은 신부가 숫처녀가 아니라면서 그 자리서 파혼하고 돌아가 버렸답니다.“ 할머니는 흥미 있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래서요.” 하고 물어본다. "신부는 영문도 모르고 소박을 맞았는데 알고 보니, 요 속에 바늘 부러진 것이 들어 있어서 그놈이 신부의 엉덩이를 찔러 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랍니다." 주인 할머니는 그 소리를 듣고 허리를 움켜잡고 웃었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 마디 했다. "그러니까 팔자 도망은 못한다는 속담이 있지요. 그 여자도 나처럼 억울하게 소박을 맞을 팔자였나 봅니다."
10년만의 귀향
어느 날 밤 김삿갓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병연아! 너는 집을 나간 지 어언 10년이 되었구나. 이제는 한번쯤 집에 돌아오도록 하여라." 김삿갓은 불길한 예감이 들고 마음이 산란해 옴을 금할 길 없었다. 김삿갓은 그동안 금강산을 유람하고 함경도를 거쳐 조선의 최북단이며 강 너머로 되땅이 바라다 보이는 종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집을 나온 지 10년 만에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고향 영월의 동구 앞에서 발을 멈추고 마을을 들여다보니 산천초목은 10년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마을 한복판에 서있는 정자나무를 보니 감개무량하였다. 김삿갓은 패군지장이 면목 없이 돌아오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집 앞으로 다가갔다. 집안에 들어가도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마침 그때 10살 가량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안마당으로 쏜살같이 들어와서 거지를 내쫓듯이 매몰차게 한마디한다. "아저씨가 누군데 남의 집에 맘대로 들어와 앉아 있어요? 나가세요." 김삿갓은 자기 집에 그 또래의 사내아이가 있을 턱이 없기에 남의 집에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 "이 집이 너의 집이냐?" "이 집은 우리 집이에요. 아저씨는 누구를 찾아 오셨어요?" "너의 아버지 댁에 계시냐?" "우리 아버지는 서울에 과거 공부하러 가셔서 지금은 집에 없어요." 때마침 바깥마당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아낙네 하나가 손에 호미를 들고 안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첫눈에 보아도 그 여인은 마누라였다. "여보, 내가 돌아왔소!" 마누라 권씨는 처음에는 얼른 남편을 알아보지 못해 어리둥절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을 나갈 때는 스물둘의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수염이 텁수룩한 할아버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누라는 남편을 알아보더니 눈물이 글썽해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당신이 돌아와 주었구려!" 김삿갓 역시 눈물이 왈콱 솟구쳐 올랐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엄마 이분이 누구세요?" "이분이 바로 서울에 과거 공부하러 가셨던 너의 아버지시다. 어서 방에 들어가 큰절을 올리도록 하거라. 네가 날마다 보고 싶어 하던 너의 아버지란 말이다." 김삿갓은 소년이 자기 아들이라는 소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0년 전 집을 나간 자기에게 10살 미만의 자식이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집을 나가실 때만 해도 임신한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당신이 집을 나가시고 나서 입덧을 시작했어요." "아! 그랬구료." 김삿갓은 잠시나마 아내를 의심했던 것이 쑥스러웠다. "그 애는 당신을 닮아 머리가 여간 총명하지 않답니다. 서당아이들 이십 몇 명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고 서당 선생님이 언제나 칭찬을 하시는걸요." 어머니 소식이 궁금해서 물어보니, 외삼촌이 며칠 전 돌아가셔서 홍성 친정으로 가셨다 한다. 꿈에 나타난 그날이 어머니가 집에서 떠난 날이었다. 큰아들 학균은 김삿갓의 형님 집에는 딸뿐이어서 큰집에 양자로 갔다 한다. 어느 날 둘째아들 익균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와 주신 것이 말할 수 없이 기뻐요. 그동안 저는 아버지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저는 아버지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그래.....고맙다."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아들을 힘차게 품어 안았다. 그러자 익균은 문득 무릎을 꿇고 앉더니 머리를 수그리며 숙연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이제 앞으로는 아무데도 가시지 말고 어머니랑 저랑 언제까지나 함께 살아주세요. 어머니와 저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익균의 눈망울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목이 메이고 가슴이 뭉클해 왔다. 가족들과 함께 정답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아버지는 이태백보다도 더 훌륭한 시인이라는 말을 여러 사람한테서 들어 알고 있어요. 그러나 시를 짓기 위해 무작정 떠돌아다니기만 하면 집안이 어떻게 됩니까?" "그래, 알았다. 이제부터는 안 그럴 테니 안심하거라." 김삿갓은 대화를 빨리 끝내려고 대답을 적당히 얼버무려 버렸다. "아버지! 고양이에 대한 시를 한 수 지어 주세요." 김삿갓은 고양이에 대한 시를 종이에 써놓고 자세히 설명해 주니 익균은 들을수록 재미가 났다. "아버지! 이번에는 닭에 대한 시를 한 수 지어보아 주세요." "응, 그래." 김삿갓은 마당에 있는 암탉을 보며 닭에 대한 시도 한 수 재미나게 지어 보였다. 익균은 아버지의 풍부한 지식에 거듭 놀라며 새삼스러이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김삿갓이 사랑하는 아들과 어울려 시를 짓노라니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어린 아들이 열심히 물어 쌓는 것이 무척 기특했다. 그때 마누라가 옆에서 말했다. "저 애야말로 당신이 집에서 지도만 잘해 주면 장차 대과에 틀림없이 장원급제할 수 있는 아이라우." "음. 정말 그럴 것 같은데......" 김삿갓은 감격스러워 고개를 끄떡이면서도 속으로는 한숨을 지었다. 무덥던 여름이 가고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살랑거리기 시작하자 김삿갓의 심경에는 커다란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거지 노릇도 사흘만 계속하면 발을 뽑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가슴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던 방랑벽이 가을바람과 함께 또다시 머리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독서를 하려고 책을 손에 들고 있어도 글자는 보이지 않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오직 방랑시절에 구경했던 명산대천들뿐이었다. (음.....조상에 대한 속죄로 한평생을 방랑객으로 살아가려던 내가 양심을 속여 가며 가족들과 함께 이렇게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어도 좋단 말인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사이에 김삿갓은 또다시 집을 나간다. 그 후 24년 간 죽는 날까지 집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익균이 성장하여 전국 각지를 수소문 끝에 김삿갓이 있는 곳을 세 번이나 찾아가 귀가를 간청했지만 김삿갓은 그때마다 교묘히 몸을 피해 거절하였다. 훗날 익균은 전라도 화순 동복에서 객사하여 가매장되어 있는 아버지의 유골을 영월로 이장해서 장사지낸다.
이름 없는 성자
김삿갓은 영월을 떠나 제천에 오니 남쪽 경상도로 갈까, 아니면 북쪽인서울 쪽으로 갈까 망설여졌다. 어디로 갈지 결정할 수가 없어서 지팡이를 공중으로 던져 보았다. 그랬더니 손잡이 부분이 서울 쪽으로 향했다. 그래서 서울을 거쳐 황해도와 평안도로 가기로 했다. 서울을 벗어난 김삿갓은 발길을 무악재로 돌렸다. 파주, 장단을 거쳐 고려 5백 년의 망국지한이 서려 있는 송도로 가는 길이다. 날이 저물어 여기가 어딘가 물어보니 벽제관이라 한다. 호주머니에 몇 닢 있어 이날 밤은 어엿하게 주막에서 잘 생각이었다. 그 주막에는 70을 넘었다는 노인이 한 분 있었다. 하얀 수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김삿갓은 저녁을 먹고 나서 노인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마침 그때 젊은이 하나가 방으로 들어와 노인에게 인사를 올린다. "저는 지금 서울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서울에는 오늘 아침에 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태연자약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서울은 워낙 복잡한 곳이라 괴상한 일이 생길 만도 하지." 노인은 괴상한 일이라는 것이 어떤 사건을 말하는지 물어볼 생각조차 안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김삿갓은 궁금하기 짝이 없어 자기가 앞질러 물어볼 밖에 없었다. "서울에 어떤 괴상한 일이 생겼단 말이오?" "서울의 진산인 남산이 오늘 아침에 무너져 버렸다오." 김삿갓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주인 노인은 놀라기는커녕 고개를 두어 번 끄떡이기만 한다. "그럴 거야, 남산은 몇백 년이나 오래된 산이니까 비바람에 부대껴서 무너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노인장! 남산이 무너진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립니까? 아무리 오래 되었기로 산이 무너진다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노인은 또다시 고개만 끄떡인다. "허기는 자네 말도 옳아. 남산이 무너질 리가 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지." 김삿갓은 그 말에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노인장께서는 이 말도 옳다, 저 말도 옳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말씀만 하고 계시니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허허허……자네 말도 역시 옳으이." 주인 노인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바로 그때, 젊은이 하나가 들어와 인사를 올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괴이한 일도 많사옵니다." 노인은 인사를 받으며 묻는다. "무슨 일이 생겼기에 괴이하다는 말인가?" "저는 오늘 소가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노인은 또다시 고개를 끄떡이며 말한다. "음....그럴 수도 있겠지. 소란 놈은 워낙 우직한 놈이니까 비록 쥐구멍이라도 우겨대고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김삿갓은 주인 노인이 노망을 하는 것 같았다. "노인 어른! 소가 아무리 우직하기로서니 어떻게 쥐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상식으로 생각해도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노인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한다. "맞아, 소란 놈은 좌우에 뿔이 있어서 쥐구멍으로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울 거야."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농락을 당하는 것만 같아서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여보시오, 영감님은 언사가 왜 그렇게도 성실치 못하시오. 된소리 안 된소리 모조리 옳다고 하시니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태연자약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허기는 자네 말이 옳아. 된소리 안 된소리 모조리 옳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지." 그러자 옆에 있던 두 젊은이가 별안간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김삿갓을 나무라는 것이다. "하하하, 노형은 왜 그렇게도 화를 잘 내시오. 우리 두 사람은 지난 날 화를 잘 내어 손해를 본 일이 하도 많았기 때문에 지금은 저녁마다 선생님을 찾아와서 정신수양을 받고 있는 중이라오. 노형도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우리들과 함께 선생님한테 정신수양을 좀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아차, 내가 너무 경망스러웠구나.> 싶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노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정중히 수그리며 솔직하게 사과하였다. "제가 불민한 탓으로 어른을 미처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경망스러웠음을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무슨 소리. 나는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무슨 일에나 시비를 가리지 않기로 했네. 그게 바로 마음을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야." 김삿갓은 주막집 노인의 도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장 같은 어른을 만나 뵙게 된 것이 다시없는 기쁨이옵니다." 노인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젓는다. "보잘 것 없는 늙은이한테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는가. 모난 돌이 정에 맞는다 하기에 나는 한평생 둥글둥글 살아오고 있을 뿐이네." 김삿갓은 노인의 말에 또 한 번 탄복을 마지않았다. 술집 늙은이를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노인으로 생각했으나 정작 알고 보니 이 노인이야말로 항간에 숨어 있는, 이름 없는 성자(聖者)가 아닌가. 다음날 김삿갓은 주막집 노인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길을 떠났다. 임진나루를 향해 걸어가노라니 어제 밤의 일이 새삼 생각이 났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색(=현실)이라는 것은 본시 공허한 것이건만 마음이 미혹하면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게 된다는 소리다. 나중에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자신을 망치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복상사
김삿갓이 산골 마을의 어느 집 사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즈음 김삿갓의 이름은 전국구여서, 조선 천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동네 노인들이 방랑시인 김삿갓이 왔다고 술병을 들고 와서 밤새도록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이십여 년 전, 그 마을에 나이 많은 훈장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남모르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이가 젊고 예쁜 마누라가 외방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일이었다. 훈장이 성미가 괄괄한 사내였으면 마누라를 개 패듯이 두들겨 패겠지만, 그 정도로 모진 성품이 못 되어서 언제나 말로만 타일러 왔다. 그러니까 마누라는 남편을 얕잡아 보고 못된 버릇을 좀처럼 고치지 않았다. 어느 날 훈장은 고향에 며칠 다녀와야 할 일이 생기자 마누라의 일이 새삼스러이 걱정되었다. “나는 갑자기 볼 일이 생겨 고향에 다녀와야 하겠네. 그 사이 임자가 무슨 짓을 할지 매우 걱정스럽네그려.” “나를 그렇게 못 믿겠거든 숫제 나의 손과 발을 꽁꽁 묶어놓고 다녀오면 될 게 아니오?” 바람을 피우는 여인일수록 머리가 영리한 법이어서 말로는 마누라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여보게, 좋은 수가 있네. 임자 불두덩에 그림을 하나씩 그려놓기로 하세. 그렇게만 해놓으면 임자가 아무리 바람을 피우고 싶어도 그림이 지워질까봐 바람을 못 피우게 될 게 아닌가?” “뭐든지 좋으니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하구려.” 마누라는 샐쭉하며 즉석에서 쾌락하였다. 그리하여 훈장은 마누라를 자빠뜨려 놓고 두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한 뒤, 옥문 좌우 언덕에 그림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언덕에는 조(粟) 이삭을 하나 그려놓고, 반대편 언덕에는 누워 있는 토끼를 한 마리 그려 놓고 떠났다. 훈장이 나들이를 떠나자 평소에 훈장 마누라와 정을 통해오던 놈팡이가 가만있을 턱이 없었다. “그 늙은이가 없으니 오늘밤은 마음 놓고 뿌리가 빠지도록 즐겨 보세.” 하고 기둥서방은 덤벼들었다. 그러나 훈장 마누라는 손을 휘휘 내젓는다. “안 돼요! 이제부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돼요.” “안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부터 나를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내가 왜 당신을 가까이 하고 싶지 않겠어요. 당신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은 당신보다 내가 훨씬 더 하다우.” 여편네는 놈팡이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속옷을 활짝 벌리고 남편이 불두덩에 그려놓은 그림을 보여주었다. 놈팡이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나는 피(稷) 이삭을 그리고 하나는 토끼를 그려놓았군 그래. 나중에 다시 그려놓으면 될 게 아닌가.” “어마! 당신 말을 듣고 보니 그런 방법이 있네요. 당신은 정력도 세지만 머리가 아주 비상한 양반이네요.” 그리하여 그들은 저녁마다 뿌리가 빠지도록 정을 나누어 오다가 남편이 돌아올 날이 되자 놈팡이로 하여금 불두덩에 그림을 깜쪽 같이 그려놓게 하였다. 훈장은 약속한 날짜에 어김없이 돌아왔다. 마누라는 남편 부재중에 죄를 지었는지라 유난스럽게 반색을 하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당신이 집에 계시지 않아 얼마나 쓸쓸했는지 몰라요.” 훈장은 어쩐지 마누라의 말이 미덥지 않았다. “그 동안에 아무 일도 없었는가?” “당신은 내가 그렇게도 미덥지가 않아요?”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고 마누라는 암만해도 의심을 받는 것 같아서 내친 김에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의심스러워 불두덩에 그림까지 그려놓지 않았소. 그 그림이 그대로 있을 테니까 직접 검사해 보면 될 게 아니오?” 하며 사타구니를 활짝 벌렸다. “허허허……임자가 그렇게까지 소원이라니 한 번 들여다볼까?” 훈장은 별다른 생각 없이 문제의 그림을 장난삼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기는 분명히 조 이삭을 그려 놓았는데 지금은 피 이삭으로 변해 버렸고, 자기는 분명히 누워 있는 토끼를 그려 놓았는데 지금은 서 있는 토끼로 바뀌어 버린 것이 아닌가? 내 마누라의 행실머리가 이렇게까지 대담무쌍하였던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새삼스러이 마누라를 책망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타구니를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득 훈장답게 한문 투로 이렇게 감탄하였다. “흐음, 선종속(先種粟)했는데 후종직(後種稷)했으니 농리(農理)에 대통(大通)한 사람이요, 홍시(紅矢)가 사합(射蛤)함에 와토(臥兎)가 경기(驚起)했으니 사격(射擊)에도 명수(名手)였구나.” <먼저는 조를 심었는데 후에는 피를 심었으니 농사 이치에 밝은 사람이고, 붉은 화살로 조개를 쏘아 누워 있는 토끼를 놀라 일어서게 했으니, 사격에도 명수구나.> 김삿갓은 거기까지 듣다가 배꼽을 움켜잡고 웃었다. “하하하……마누라가 그 어려운 문자를 알아들었을까요?” “무얼 알아들었겠소. 남편이 웃어 쌓으니까 마누라도 안심하고 웃기만 했다는군요.” 그래서 좌중에는 또다시 폭소가 터졌다. 웃고 있는 와중에 한 노인이 씁쓸하게 한마디 했다. “그날 밤 훈장은 자기도 누구 못지않게 정력이 왕성하다는 것을 마누라에게 과시해 보이다가, 불행하게도 마누라의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나 버렸다우.“ “뭐요? 그러면 복상사를 했다는 말씀입니까?” “마누라가 워낙 외방 남자만 좋아하니까, 훈장은 열등감이 심하게 느껴졌는지 ‘나도 사내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뭔가를 보여 주려고 하다가 결국은 목숨을 빼앗기게 된 것이지요.” 김삿갓은 어쩐지 인생의 허무감이 느껴져, 가슴이 써늘해졌다. 옛글에 미자불문로(迷者不問路)라는 말이 있다. 인생에는 참된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그 길을 깨닫지 못해 결국은 몰락하게 된다는 소리다. 김삿갓은 그 말이 생각나서 새삼 숙연한 심정이었다.
숨은그림 찾기
김삿갓은 산길을 진종일 걸어오다가 해거름에 어떤 마을에 당도하니 고래등같은 기와집 마당에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떡을 치고 한편에서는 부침개를 부치고. 김삿갓은 부침개 냄새를 맡자 새삼스러이 허기가 느껴져 옆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무슨 대사가 있기에 이렇게도 법석거리오?" 마을 사람들은 김삿갓을 나무라듯 대답했다. "당신은 내일이 오 진사 댁 진갑 날이란 것을 모르오. 이번 진갑 날에는 본관 사또 님을 모시기 위해서 돼지 다섯 마리와 황소 한 마리를 잡았다오." 옆에 있는 사람은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이 사람아! 사또께서 내일 오실지 안 오실지 몰라서 오 진사 어른은 지금 똥이 타고 계시다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오 진사는 며칠 전 사또에게 사람을 보내 이번 진갑 잔치에 꼭 왕림해 주십사는 서한을 보냈는데 사또는 즉석에서 답장을 써 주었다. 그런데 답장의 내용이 온다는 것인지 안 온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쩔쩔매고 있다 한다. 만약 사또가 온다면 오진사가 동구 밖에 까지 마중 나갈 준비도 해야 되고 사또에게 드릴 큰 상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딱한 사정이다. 김삿갓은 은근히 흥미가 동해서 오 진사에게 가서 정중히 여쭈었다. "지나가던 과객이올시다. 댁에서 어떤 편지 관계로 무척 심려 중에 계시다고 들었기에 소생이 한번 풀어 볼까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똥이 타고 있던 오 진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김삿갓을 사랑방에 정중하게 모셨다. 넓은 사랑방 안에는 사또의 편지를 읽어 주려고 모여온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열 명이나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선 술이나 한잔 주시오." 하고 김삿갓이 한마디 하였다. 오진사가 손수 주전자를 들고 와서 정중하게 한잔 따른다. 앉아 있던 선비들은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우리가 풀지 못하는 사또의 편지를 너 같은 게 감히 어떻게 풀 수 있다고 술을 덥석덥석 받아 마시느냐고 아니꼽게 여기는 눈치다. 사또의 편지를 보니 한지로 반절 넓이의 큰 지면에 커다란 글씨로 來不往 來不往 이라는 여섯 글자만이 적혀 있을 뿐이 아닌가. 김삿갓은 너무도 간단한 데 놀랐으며 눈앞이 아찔해 옴을 느꼈다. 그 문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전연 알 수가 없었다. "음...... 매우 기기괴괴한 문장인걸!" 김삿갓은 우선 생각해 볼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해 천연덕스럽게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방안에서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오 진사는 초조해서 다급하게 물어 보았다 "선생! 사또께서 오신다는 겁니까? 안 오신다는 겁니까?" "음..... 사또 어른하고 진사 어른하고는 매우 두터우신 사인가 보구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장난스러운 편지는 보내지 않았을 터인데......" 오 진사는 만면에 웃음을 피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가깝다 뿐이겠소이까. 어려서부터 동문수학을 하면서 별의별 장난을 다해온 사이랍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사또의 편지는 틀림없이 참석하겠다는 사연임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친구지간에 초청을 받고 참석을 못하면 한마디쯤 사과의 말이 있어야 옳은 일인데 그런 빛은 전연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사또께서는 진갑잔치에 틀림없이 참석하겠다고 했으니 영접할 준비를 서두르시죠." 하고 김삿갓은 선언했다. 오 진사는 그 말에 뛸 듯이 기뻐하며 물어본다. "어떻게 풀이했는데 그런 해답이 나오게 됩니까?" 김삿갓이 자신만만하게 단안을 내리자 옆에 있던 선비들은 공술만 얻어먹기가 미안했던지 아니면 열등감을 느낀 탓인지 제각기 공박한다. "귀공은 그 문장을 어떻게 해석했기에 그런 단안을 내리시오?" 옛날에 80객 노인이 나이 어린 처녀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하나 낳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노인은 임종이 가까워 오자 가족들에게 <八十生男非吾子> 라는 유서를 한 장 내 보였다. 유족들은 그 여자에게 유산을 나눠주지 않으려고 <80에 생남했으므로 그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해석했고, 아기 어머니는 유산을 나눠 받기 위해 <80에 생남했은들 어찌 내 아들이 아니오.> 라고 해석했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한문이란 그처럼 토를 달기에 따라서 해석이 뒤바뀌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다. <앗! 바로 이런 뜻이로구나.> 하고 김삿갓은 마침내 정답을 알아내게 되어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싱긋이 웃었다. 오 진사는 답답한 심정을 견딜 수가 없는지 간청을 한다. "여보시오. 선생! 나는 지금 똥이 타다 못해 이제는 간이 타오를 지경이오. 편지 사연을 알고 계시거든 애를 태우지 말고 빨리 설명을 해주시오." "하하하, 이 편지는 결코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來不, 往>과 <來, 不往>이라고 토를 달아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설명하면 <오지 마라고 해도 가겠는데, 하물며 오라고 하는데 어찌 가지 않겠느냐?> 하는 소리올시다." 김삿갓의 설명을 듣고 나자 좌중에는 별안간 폭소가 터졌다. "과연 듣고 보니 선생의 해석은 귀신과 같으시오이다. 선생 덕분에 만사가 시원스럽게 풀려서 내가 이제야 살아나게 되었소이다. 여봐라, 지금 우리 사랑에는 귀한 선비님이 와 계시니 술상을 새로이 푸짐하게 차려 내오도록 하여라." 옆에 있던 선비들도 저마다 감탄을 마지 못한다. 이리하여 김삿갓은 사또의 편지를 풀어준 덕택에 술과 음식을 배불리 얻어먹었고 그 날 밤에는 오 진사 댁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편히 지낼 수가 있었다. 다음 날, 사또의 행차가 가까워 온다는 전갈이 있자, 오 진사는 직접 마중을 나가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김삿갓은 개밥에 도토리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았다. 조반을 한 술 얻어먹고 나서 아무도 모르게 오 진사 댁에서 나와, 구름처럼 바람처럼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걸음걸음 구름 따라 숲 속에 들어서니 솔바람 냇물소리 옷깃을 씻어주네 뜬세상 사람들 누가 나를 알아주랴 오로지 산새만이 내 마음 알아주리
돌팔이 의원
김삿갓이 하루는 날이 저물어 산골 서당에서 신세를 졌는데 훈장은 의원도 겸하고 있었다. 이런 산골에 훈장과 의원을 같이 볼 인재가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대면해 본 즉슨, 첫눈에도 그럴 만한 위인이 못 되어 보였다. “실례의 말씀이지만, 선생은 동의보감이라는 책을 읽어 보셨소?” “동의보감이라뇨. 그 책은 논어나 맹자와 같이 사서삼경에 들어 있는 책입니까?” 김삿갓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동의보감 같은 의서를 읽어보지 않고서 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다는 말씀이오?” 돌팔이 의원은 코웃음을 치면서 김삿갓을 넌지시 나무란다. “무슨 병이나 적당히 시간을 끌어가노라면, 열에 아홉까지는 절로 낫게 마련이라오. 그런 수법을 잘만 이용하면 명의가 되는 것이지, 명의가 따로 있는 줄 아시오.” 듣고 보니 명언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돌팔이 의원이라도 이 사람은 머리만은 비상하고 명석한 것 같았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 웬 청년이 들어왔다. “선생님, 저는 웬일인지 기운이 없어, 선생님한테 진찰을 받아 보려고 왔사옵니다.” “음, 기운이 없어서 진찰을 받으러 왔단 말이지?” 돌팔이 의원은 갑자기 위엄을 떨며, 사뭇 신중한 어조로 반문한다. 김삿갓은 이 돌팔이 의원이 환자를 어떻게 다루는가 싶어,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밥은 잘 먹는가?” “네, 식욕이 왕성한 걸 보면, 병은 없는 것 같사옵니다.” “음, 밥을 잘 먹는데도 기운이 없다면, 자네는 술을 많이 마시기 때문이 아닌가?” “아닙니다. 술처럼 몸에 해로운 것이 없는데, 몸에 해롭다는 술을 무엇 때문에 마시겠습니까?” “식욕이 왕성할 뿐 아니라, 술도 마시지 않는데 기운이 없다면, 자네는 용색이 과도한 모양일세 그려.” “선생님, 그것은 오진이시옵니다. 색을 쓰는 일처럼 몸에 해로운 일이 어디 있다고 색을 함부로 씁니까. 저는 용색을 한 달에 한 번쯤 할까 말까, 여자는 될수록 멀리해 오고 있사옵니다.” 돌팔이 의원은 그 말을 듣자 별안간 얼굴에 노기가 충만해지더니, 벼락같은 호통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뭐, 어쩌구 어째? 계집질을 한 달에 한 번밖에 안 한다고? 이 거지발싸개 같은 놈아. 하룻밤에 열 번을 해도 싫지 않을 나이에, 몸에 해롭다고 해서 그 좋은 것들을 이것도 안 한다, 저것도 안 한다면, 네 놈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간단 말이냐. 너 같은 놈은 꼴도 보기 싫다. 당장 뒈져 버려라!”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노발대발이었다. 그러나 그 호통이 어찌나 추상같던지, 청년은 용수철을 퉁긴 듯이 벌떡 일어나서 번개처럼 도망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아무리 의사 선생님이기로, 약국을 찾아온 환자에게 호통을 친 것은 너무하셨소이다.” 그러나 돌팔이 의원은 고개를 단호하게 가로 젓는다. “환자라구요? 사내구실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무슨 환자란 말씀이오. 그런 놈은 밥벌레밖에 못 되는 놈이오.” 그리고 돌팔이 의원은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의원 간판을 내건 지 열흘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산골 사람 하나가 불덩어리같이 열이 높은 어린 애기를 업고 왔다. “선생님, 이 애가 무슨 병인지 몸이 불덩어리같이 달아오르고 있으니, 열을 좀 내리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돌팔이 의원은 패독산을 한 첩 지어주었는데, 패독산만 가지고는 미흡할 것 같아서 부자를 몇 톨 곁들여 넣어주었다. 부자는 극약인 줄은 모르고, 다만 열제인 줄만 알았기 때문에, 자기 딴에는 이열치열하는 약을 지어 준답시고 약방문에도 없는 부자를 첨가해 주었던 것이다. 어린 애기는 집에 돌아가 그 약을 먹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러니까 애비되는 사람이 의원으로 달려와 애기를 살려내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돌팔이 의원은 속으로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나 머리를 수그려 사과를 했다가는 뒷수습이 어려울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그 약을 먹고 열이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네. 자네 말을 믿을 수 없으니, 나와 함께 직접 집에 가보세.“ 돌팔이 의원은 환자의 집으로 달려와 애기의 시체를 만져 보다가, 태연스럽게 다음과 같이 호통을 질렀다는 것이다. “이 사람아! 자네는 멀쩡한 거짓말을 했네 그려. 애기는 몸이 싸늘할 정도로 열이 깨끗하게 내렸는데, 뭐가 불만스러워서 야단이란 말인가.”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포복절도를 하였다. “하하하, 선생 배짱은 알아줘야 하겠습니다. 그래, 호통을 질러서 문제가 잘 해결되었습니까?” “애기는 이미 죽어 버렸는데, 해결이 안 되면 어쩔 것이오. 복잡다단한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려면 배짱이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오. 이 산골에서는 엔간히 잘못된 일이 있어도 무작정 윽박질러 깔아뭉개 버려야지, 섣불리 잘못 됐다고 사과라도 했다가는 이 자리를 쫓겨나게 된다우. 하하하…… 내 말 알아들으시겠소?” 김삿갓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뱃가죽이 당길 정도로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김삿갓 욕설 시
김삿갓은 날이 저물어 잠자리 신세를 지려고 서당으로 들어갔다. 서당에서는 조무래기 아이들이 핏대를 올려가며 글을 읽고 있는데, 선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김삿갓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아이들에게 물었다.“얘들아, 선생님 어디 가셨느냐?”아이들은 김삿갓의 행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희들끼리 얼굴을 마주보며 말한다.“얘들아! 저 사람 거지 아냐? 모른척하고 글이나 읽자.”그 말을 듣자, 이때까지 세속적인 시비에 대해서는 초연한 자세로 살아왔던 김삿갓은 문득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김삿갓은 넘치는 성질을 억누르고 아이들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얘들아, 선생님 어디 가셨느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어른이 물어 보거든 고분고분 대답을 해야지 왜 말이 없느냐?”“얘들아, 저 사람은 틀림없는 거지야. 대답할 것도 없어. 우리는 글이나 읽자.”사태가 그쯤 되고 보니, 김삿갓은 머리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김삿갓은 아이들을 둘러보며, 자기도 모르게 제법 큰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선생은 내 불알이요, 생도는 넘이 습이다. 서당은 내 조지요, 방중엔 개존물이네!”누가 들어도 입에 담기 힘든 해괴망측한 욕설이었다.마침 그때, 오십 가량 되어 보이는 텁석부리 영감이 들어서며 호통을 친다.“이놈들아, 읽으라는 글은 안 읽고 무슨 장난들을 하고 있느냐?”그 늙은이가 훈장인 모양이었다.“선생님! 저기 툇마루에 앉아 있는 저 사람이 우리들한테 욕을 퍼붓고 있어요.”“저 사람이 너희들한테 욕을 퍼붓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선생님,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이 선생님을 내 불알이라고 욕하는 거예요?”“게다가 우리들더러는 네미 십이라고 욕을 하구요.”“또 있어요. 서당은 내 좆이고, 방중에 있는 건 개좆물이라는 거예요.”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훈장은 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훈장은 김삿갓 앞으로 다가와 위엄을 보이려고 장승처럼 우뚝 서면서 거만하게 따져 묻는다.“도대체 당신은 아이들에게 무슨 까닭으로 욕을 해서, 아이들을 저렇게 분개하게 만들었소?”김삿갓은 조용히 일어나 머리를 정중하게 수그려 보이며, 우선 자기소개부터 하였다.“저는 지나가던 과객이올시다. 길이 저물어 서당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갈까 했는데, 공교롭게도 선생이 계시지 않아 선생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옵니다.”김삿갓이 예의바르게 나오자, 훈장은 그의 범상치 않은 행동과 눈빛에 혈압을 올렸던 자신을 누그러뜨리며 말한다.“하룻밤 쉬어 가신다는 데야 누가 마다고 하겠소. 그렇다면 우선 방으로 들어오도록 하시오.”김삿갓은 서당 안으로 들어와서 초면 인사를 정식으로 청했다.훈장은 인사를 나누고 나서도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아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노형은 나와 아이들에게 해괴망측한 욕설을 퍼부었다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김삿갓은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이렇게 둘러대었다.“내가 워낙 시를 좋아해서, 조금 전에 즉흥시를 한 수 읊었는데,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그 시를 아마 해괴망측한 욕설로 들었던 모양이구료.”그리고 김삿갓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보였다.先生來不謁生徒念而習書堂乃早知房中皆尊物한문을 발음 나는 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선생내불알생도념이습서당내조지방중개존물우리말로 풀이하면 아래와 같다.선생은 와도 보이지 아니하고생도는 글만 열심히 읽고 있구나서당은 내 일찍부터 알고 있나니방안에는 모두가 귀한 집 자손들이다.훈장은 시를 읽어 보니 시비를 걸 만한 대목은 한 군데도 없었다. 훈장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즉석에서 우리말 소리 나는 대로 한시를 짓는 이 사람의 능력과 학식에는 정말 자신이 누군가의 불알이 되어 버린 듯한 심경이었다. 훈장은 백 번 죽었다 깨어난들 그의 발끝에도 갈 수 없음을 절감하였다. 훈장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형용할 수 없는 존경심이 솟구쳤다. 훈장은 머슴아이더러 술도가에 가서 탁주 한 말을 지고 오라고 이른다.이윽고 술상이 벌어지자, 훈장은 김삿갓에게 정중하게 술을 권하며 묻는다.“도대체 노형은 집이 어디며,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오?”김삿갓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나는 집도 없고 가족도 없소이다. 발길가는 대로 떠돌아다니는 뜬구름이올시다.”
대동강
오도산에서 오십 리밖에 안 된다는 길을 사흘이나 걸어서 석양 무렵에야 대동강 나루터에 도착하였다. 김삿갓은 용용(溶溶)하게 흘러가는 강물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었다. 뱃사공은 푸른 물결을 헤치며 노를 흥겹게 젓고 있었다. 눈을 들어 보니 대동강에는 수많은 놀잇배가 떠 있다. 선남선녀들이 가득 타고 있는 놀잇배에서는 유량한 노래 소리와 함께 멋들어진 장구 소리도 아득히 들려오고 있었다. 조선조의 대유(大儒) 정도전은 일찍이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흥에 겨워 강수지사(江水之辭)라는 유명한 노래를 남긴 것이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에 난주(蘭舟)를 띄웠노라 유량한 풍악소리로 손님을 맞아 잔을 드노라 물위에 뛰어 오르는 것은 잉어요, 물결 따라 날아가는 것은 갈매기인가 먼 포구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언덕에는 풀이 무성하여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느라 돌아갈 줄을 모르노라 햇발은 서산에 기우는데 흐르는 물은 멈출 줄을 몰라 즐거움은 한이 없구나 아아, 젊음은 다시 오지 않는데 내 이미 늙었으니 무엇을 바라랴 군자에게 소중함은 오직 의(義)뿐이니 만고천추에 이름을 남기는 것 뿐 술잔을 들어 권하노니 우리 모두 옛사람의 높은 뜻을 배워 기리자 김삿갓은 언덕 위에 올라앉아 저물어 가는 대동강을 언제까지나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오자 강 위에 떠 있는 놀잇배에서는 등불이 하나 둘씩 꽃처럼 피어오른다. 그것은 마치 꿈나라의 환상인 것만 같아 시흥이 절로 떠오른다. 대동강에 떠있는 수많은 놀잇배들 피리소리 노래 소리 바람결에 들려 오네 길손은 발 멈추고 시름겹게 듣는데 창오산 노을이 구름 속에 저문다. 꿈같은 세상에 봄이 찾아오니 허황한 인생이 물거품 같구나 오만가지 시름을 모두 없애고 술 이외에 또 무엇을 바라랴. 날이 저물어 시장기가 나며 술 생각이 간절해 왔다. 성안으로 들어오니 밤거리에는 사람들이 번다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주막에 들어오니 주인은 60이 넘은 파파 할머니였다. "나 술 한 잔 주시오. 오늘 이 집에서 자고 갈 수도 있겠지요?" "좋도록 하시구료. 방은 하나뿐이지만 선객(先客)이 있으니까 함께 주무시면 될 거요." 술을 마시고 있노라니까 방안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방안에 지금 누가 있어요?" 주인 노파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누구는 누구겠어요. 오늘밤에 동숙할 선객이지요." "방안에 계신 형씨! 이리 나오시오. 술이나 한잔 나눕시다." 방안에 있던 손님은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얼른 술청으로 나오며, "실례하겠소이다." 하고 술상 앞에 마주 앉는다. 나이는 40쯤 되었을까. 무척 우둔해 보이는 시골 사람이었다. "나는 옹진서 염전업을 하지요. 장사 차 소금 한배를 싣고 왔다가 쫄딱 망해서 지금은 알거지라오." "어쩌다가 그런 엄청난 실패를 하셨소?" "돈은 주체할 수 없이 많이 벌었지만 기생 외도에 미쳐 그 많은 돈을 몽땅 퍼주어 버렸소. 평양기생들은 사람을 어떻게나 잘 녹여대는지 돈을 있는 대로 다 퍼주고 싶어지던데요." "그렇게도 많은 돈을 퍼주었으면 정이 꽤 많이 들었을 터인데 돈 떨어지자 상종을 안 합디까?" "돈 떨어지자 님 떨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소? 평양기생들은 소금 한 배를 몽땅 삼키고도 짜다는 말 한마디 안 하더란 말이오. 그래도 나는 후회는 안하오.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 평양기생과의 즐겁던 기억은 영원히 남을 것이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래, 고향에 내려갈 노자는 있소?" "내가 돈이 똑 떨어진 것을 알자 그 기생은 <처자식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속히 고향에 돌아가 보라>고 하면서 노자만은 주던걸요. 그래도 고맙던데요." 돈을 몇 천 금이나 퍼준 주제에 고향에 돌아갈 노자 몇 푼 받은 것을 다시없는 은혜로 생각하고 있으니 김삿갓으로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돈이 되면 다시 한 번 놀러 오겠단다. 그러나 주인 노파는 별로 우습지도 않은지 예사롭게 이렇게 말한다. "지난 가을에는 전라도에서 생강장수가 생강 한배를 싣고 와서 거금을 치부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결국은 그 많은 돈을 어떤 기생한테 몽땅 빼앗겨 버렸다는 거예요. 그 기생은 생강 한 배를 몽땅 삼켜 먹은 셈이지요." "남자들은 코밑에 있는 입으로만 먹을 줄 알지만 기생들은 논이든 밭이든 소금이든 생강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대는 입이 따로 있는 모양이구료." "그 생강장수는 생강 한 배를 몽땅 빼앗긴 것이 어지간히 억울했던지 어느 날 기생의 옥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시를 한 수 읊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우." 김삿갓은 옥문을 들여다보며 시를 지었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 틔였다. "할머니는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를 아시오?" "알구 말구요. 평양 사람들 치고 그 시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갓시오." 멀리서 보면 말눈깔 같고 가까이 보면 짓무른 헌데 같도다 두 볼에 이빨도 하나도 없건만 생강 한 배를 늠실 삼켜 먹었구나. 遠看似馬目 近視如膿瘡 兩頰無一齒 能食一船薑
마나님의 굳은 절개
늘 보아오던 산이요, 늘 보아오던 물이기는 한데 오늘따라 청산도 처음 보는 것 같고 녹수도 처음 보는 것 같아 산과 물 사이를 걸어오는 김삿갓의 입에서는 우암 송시열의 시조 한 수가 절로 흘러 나왔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절로 수 절로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절로 그 중에 절로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날씨가 무척 화창한 어느 봄 날, 김삿갓이 산길을 걸어가는데 우연히 지나가는 아낙네를 한 명 보았다. 장옷을 입고 남바위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 댁 마나님으로 보였다. 하인도 안 데리고 이 산길을 혼자 가다가 도둑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저러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인이 지나간 지 한참 됐는데 제법 멀리서 다투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혹시 도둑을 맞은 것은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나서 뛰어가 보았다. 저만큼 잔디밭 위에서 아까 그 마나님이 50세가량 되어 보이는 스님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자 그때 스님이 마나님의 손목을 움켜잡으려고 팔을 내밀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이 산중에서 한 번쯤 정을 나누기로 뭐가 나쁘단 말이오?” 하고 해괴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런 때려죽일......” 그러나 마나님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당당한 위엄을 보이며 스님을 이렇게 꾸짖는 것이었다. “대사께서는 어찌하여 일시적인 사념(邪念)으로 파계를 하려고 하시나이까. 한두 번의 과오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옵니다. 이 순간부터나마 사념을 깨끗이 버리시고 수행에 전념하도록 하시옵소서.” 그러나 욕정에 눈이 뒤집힌 중놈은 좀처럼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중놈은 회색 장삼에 어깨에는 붉은 가사를 걸쳤고 손에는 육환장(六環杖)까지 짚고 있어서 차림새만으로는 고승처럼 품위가 있어 보였다. “우리가 이 깊은 산중에서 단둘이 만난 것은 전생부터의 인연일 것이오. 그대는 어찌하여 전생부터의 인연을 무시하고 나의 간절한 욕구를 거절하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두말 말고 나의 소원을 꼭 들어주오.” 그러나 마나님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의연하였다. “대사께서는 무슨 당치 않는 말씀을 자꾸만 하고 계시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소이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 그런데 대사께서는 육욕을 탈피하지 못해 탐욕, 번뇌에 시달리고 계시오니 한시 바삐 해탈의 눈을 뜨도록 하시오. 그것만이 불제자가 걸어 가야할 정도일 것이오이다.” 마나님은 불교에 대한 소양이 풍부한지 중놈을 깍듯이 존중하며 도도하게 이론으로 꾸짖는다. 그러나 육욕에 환장한 중놈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갈 리가 없다. “나는 그대와 불경을 토론할 생각은 없소. 그러면 우리 말재주로서 승부를 가리면 어떻겠소.” 설득으로는 성공할 자신이 없음을 깨닫자, 중놈은 또 다른 편법으로 나온다. “내가 이제부터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의 순서로 그대에게 요구하는 일을 말로 들려 보일 터인즉, 그대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대답해 보시오. 대답을 제대로 못했을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 말을 들어줘야 할 것이오.” 중놈의 요구는 어거지다.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악착같이 덤벼든다. 마나님은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중놈의 고집을 꺾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는지, “좋소이다. 그러면 대사가 내기를 걸어오시오. 그러면 내가 대(對)를 놓아 보이겠소이다.” 저 마나님이 어떤 봉변을 당하려고 해괴한 내기를 응낙하는가 싶어 김삿갓은 가슴이 철렁한다. 중놈은 이제 됐다 싶은지 크게 기뻐하며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내기 말을 씨부려 대는 것이었다. 일, 일룡사 사는 중이 이, 이룡사 가는 길에 삼, 삼로 거리에서 사, 사대 부인을 만났으매 오, 오음(五陰)이 불통하여 육, 육효로 점을 치니 칠, 칠괘도 좋다마는 팔, 팔괘는 더욱 좋다 구, 굽어라 십, X좀 하자 중놈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도 해괴한 음담패설이었다. 바로 그 순간, 마나님은 자세를 바로 하더니 중놈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벼락같은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 천하의 잡놈아. 내가 다시 한 번 훈계를 내릴 테니 내 말을 똑똑히 듣거라!” 일, 일편단심 이내 마음 이, 이심이 있을소냐 삼, 삼강이 뚜렷하고 사, 사리가 분명커늘 오, 오할(五割)할 이 잡놈아 육, 육환장 둘러 짚고 칠, 칠가사 둘러메고 팔, 팔도를 편답하며 구, 구하는 게 십, X이더냐 마나님의 호통은 추상같이 준엄하였다. 마나님은 지금까지는 말끝마다 대사님, 대사님 하고 깍듯이 존중하다가 <오할할 이 잡놈!> 이라고 불호령을 지르니 중놈은, “천하에 무서운 계집이로고.” 하며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중놈이 도망을 가버리자 마나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산길을 다시 조용히 걸어 내려간다. 참으로 대단한 부인이기에 김삿갓은 먼빛으로나마 머리를 몇 번이고 수그려 보았다.
청천강
산은 날마다 보아도 볼수록 보고 싶고 물소리는 언제 들어도 싫지 않도다 귀와 눈이 모두 절로 깨끗해지니 소리와 빛깔 속에서 마음이 편안하구나 김삿갓은 유유히 시를 읊으며 안주 방향으로 삼십 리쯤 걸어오니, 넓은 들판에 한 줄기 강물이 용용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강이 일명 살수라고도 부르는 청천강이었다. 청천강은 수량도 풍부하려니와, 거침없이 흘러가는 물이 옥구슬처럼 맑기도 하였다. 물이 하도 맑아서 이름을 청천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강가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는 동안, 고구려 시대에 있었던 살수대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잠시 회상해 보았다. 그 당시 수나라는 고구려를 치려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성을 일거에 점령하려고 청천강까지 노도와 같이 몰려왔었다. 그런데 강을 막 건너려고 했을 때 마침 그때, 일곱 명의 스님들이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 강을 걸어서 건너가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을 목격한 적군은 강물이 얕은 줄로 알고, 백만 대군이 일시에 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바로 그때, 숲 속에 잠복해 있던 을지문덕 장군의 고구려 군사들이 별안간 후방에서 열화 같은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적군은 혼비백산하여 물속으로 쫓겨 들어가, 결국은 백만 대군이 한꺼번에 수장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밖에 없는 것이, 일곱 명의 승려들이 걸어서 건너간 청천강의 물의 깊이는, 실상은 두 길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청천강은 그처럼 청사에 빛나는 역사의 현장이건만,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물은 묵묵히 흐르고 있고, 강 위에는 고깃배 두세 척만이 한가롭게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깊이가 두 길이나 되는 청천강을 일곱 명의 도승들이 무슨 재주로 걸어서 건너왔기에, 백만 대군을 일시에 수중고혼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 일곱 도승들의 초인적인 재주는 여러 백 년을 지난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정작 그들의 이름은 누구에게도 아직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의 영토는 북으로는 멀리 송화강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기까지 만주 전역에 확장되어, 어느 나라도 감히 넘겨다볼 수 없는 강대한 국가가 되었다. 그렇게도 막강하던 고구려가 그 후 3백 년이 지나는 동안에 어이없게도 패망하게 된 원인은 도대체 어디 있었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을 무열왕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찬양해 오고 있다. 그러나 민족사적 견지에서 볼 때 과연 올바른 비평이었을까? 무열왕은 삼국 통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이민족인 당나라의 힘을 빌려 동족 국가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버림으로써 고구려가 이미 점령하고 있던 광활한 만주 대륙을 되놈들에게 지금까지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그뿐이랴. 우리 민족은 약소민족으로 전락됨으로써, 당의 뒤를 이은 원, 명, 청 등의 이민족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달림을 당했던가. 그로 인해 우리 민족에게 사대주의 사상이라는 천년 화근까지 심어놓았다. 옛글에 보면 형제끼리는 비록 담 안에서는 싸울망정, 외부에서 덤벼올 때는 모두가 힘을 모아 막아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는 비록 싸우기는 하더라도, 형제간의 싸움에 이민족을 불러들인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었다. 무열왕은 그와 같은 영원한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목전의 소리(小利)에만 눈이 어두워 민족적인 대의를 그르쳐 버렸던 것이다. 김삿갓은 배를 타고 청천강을 건너가며, 지난날의 역사를 회고하고 비탄의 한숨을 자기도 모르게 쉬고 있었다. 그러한 일을 생각하면 무열왕은 삼국 통일의 영웅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영원한 죄인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유서 깊은 곳에 와서 을지문덕 장군께 참배를 드리고 싶어 사당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고 공적비조차 하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의 나라 장수인 관우 묘는 전국 각지에 세워놓고 봄과 가을에 성대한 제사까지 지내주고 있으면서 청천강에 외적 백만 대군을 고깃밥으로 만든 위대한 업적을 남긴 명장, 을지문덕 장군의 사당 하나 없다는 것은 민족적인 치욕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김삿갓은 조선 팔도에서도 경치 좋기로 이름난 청천강변의 백상루에서 한나절을 보내다가 안주성의 북쪽에 있는 칠불사(七佛寺)로 발길을 돌렸다. 청천강을 걸어서 건너갔다는 일곱 분 스님들의 유적을 알아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절에서도 일곱 분 스님들의 이름과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사기(寺記)에 일곱 스님들의 공적이 언급되어 있고 그 공을 기리기 위해 일곱 분의 돌부처를 세워 놓았다고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기록에는 을지문덕 장군의 공로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어서, 김삿갓은 그 점이 몹시 섭섭하였다. 아무튼 일곱 명의 스님들은 고구려를 구해 준 스님들이었기에 김삿갓은 일곱 개의 돌부처님께 깊이 머리 숙여 오랫동안 배례하였다.
옥구 김 진사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와 옥구에 들어섰을 때는 가을도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 해 가을에 전라도 일대에는 심한 흉년이 들어 김삿갓은 열 집, 스무 집을 다녀 보아도 하루 한 끼 얻어먹기가 어려웠다. 돈은 한 푼도 없고 날씨는 날마다 추워 오는데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아직도 여름옷 그대로였다. 눈앞에 닥쳐오는 엄동설한은 어떻게 넘길 것인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던가. 날마다 기아에 허덕이다 보니 이제는 좋은 경치만 찾아다닐 마음의 여유조차 없게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서 피골이 상접해 오는데 몸이 야위어 올수록 추위가 더 혹독하게 느껴진다. 구걸 생활을 30여 년이나 해 왔건만 이때처럼 혹심한 고초를 겪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김삿갓은 추위를 참고 견디다 못해 어느 집으로 찾아가 이런 사정을 해 보았다. “지나가던 나그네올시다. 감기에 걸려 열이 심하니 하룻밤 잠 좀 자고 가게 해주십시오.” “여보시오, 사람이 야박하게 잠만 어떻게 재워줄 수 있소. 올해는 흉년이 심해 우리도 지금 밥을 굶고 있다오. 이 마을 어디를 가도 얻어먹을 집은 없을 것이오. 여기서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김 진사라는 부자 댁이 있소. 그 집에 가면 돈도 많고 쌀도 많으니 그리로 가보시오.” 별로 험한 고개도 아니건만 고개 하나를 넘는데도 힘이 몹시 겨웠다. 고개 위에서 바라보니 과연 산 밑에 고래 등같이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저 집이 바로 김 진사 댁인가 보구나. 저만한 부자라면 밥도 배불리 먹여주고 잠도 따뜻하게 재워주겠지.’ 김삿갓은 울렁거리는 흥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