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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라 & へ山行
Study/Three Kingdoms Of China

중국의 4대 직할시

by 유리의 세상 2010. 11. 15.

중국의 4대 직할시 

 

 

4개 직할시: 북경,천진,상해,중경

                 北京,上海,天津,重庆.

 

5개 자치구: 신강 , 서장,  녕하,  광서,  내몽골

                  新疆、西藏、宁夏、广西、内蒙古

23개성:흑룡강,길림,료녕,하북,하남,

            黑龙江,吉林,辽宁,河北,河南,

            heilongjiang,jilin,liaoning,hebei,henan,

           산동,광동,운남,강서,산서,

           山东,广东,云南,江西,山西,

          shandong,guangdong ,yunnan,jiangxi,shanxi,

          사천,절강,복건,호남,호북,

          四川,浙江,福建,湖南,湖北,

          sichuan,zhejiang,fujian,hunan,hubei,

          해남, 감숙,귀주,강소,안휘,

          海南,甘肃,贵州,江苏,安徽,

          hainan,gansu,guizhou,jiangsu,anhui,

          청해,대만,섬서.

          青海,台湾,陕西。

          qinghai,taiwan,shanxi.

 

 

 

 

1. 정치와 문화의 중심, 천년고도(千年古都) 북경(北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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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면 적 : 16,800㎢

 - 인 구 : 약 1,700만 명


북경의 첫번째 특성은 정치 중심 도시라는 것이다. 또한 북경은 제1의 도시 기능을 한다. 전국적인 정치 중심의 위상을 가지고 있어 전국적 서비스를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엄격히 말하면 북경이 가지고 있는 다른 기능들은 모두 정치 중심 기능으로 부터 파생된 것이다. 정치 중심 기능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도시 기능이
있다. 문화의 중심이라는 것은 북경의 두 번째 성격이다. 경제의 중심이라는 의미는 상해와 충돌이 생길 수 있으나, 중앙계획경제 시기, 북경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전국의 경제 생활의 수요를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중앙계획경제의 체제가 아니므로 북경이 경제의 중심이 된다는 의미는 상당히 퇴색되었다. 그러나 북경은 지금도 상해와의 소비적인 경쟁을 벌여 북경에도 금융중심구역을 설정하는 등, 낭비에 가까운 중복투자를 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 가지 고질적인 낭비행위 중에 하나가 바로 북경과 상해의 경쟁적인 중복 투자이다.
그러나 북경은 제조업 유치에 대하여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 모택동 통치시기 였던 1958년에 이미 북경 건설 계획에서 밝혔듯이 북경에 대형 공업시설을 건
설하지 않고 중앙기관과 고등 교육기관만 세운다면 단순히 소비수준이 높은 소비도시를 만든다는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북경의 중관촌(中關村)은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고 있으며 해외 및 중국 각지의 IT 인재들이 북경으로 몰리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북경은 중국의 8대 중심, 즉 정치의 중심, 문화의 중심, 경제관리의 중심, 교통의 중심, 정보의 중심, 국제 왕래의 중심, 관광의 중심, 공업중심도시 등의 역할로 전
국적인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주요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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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紫禁城)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은 15세기 초 明나라의 3대 황제인 영락제가 남경(南京)으로부터 북경으로 천도할 때에 원대(元代)의 고궁유적을 기초로 세우기 시작하여 영락(永樂) 18년에 완성한 것이다.
당시 북경성내에는 황성으로 불려지는 높은 성벽이 있고, 그 황성에 둘러싸여 있는 자금성은 바로 북경성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자금성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고, 면적은 72만 평방미터이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중추선상에는 남쪽으로부터 태화문(太和門),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건청문(乾淸門),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곤녕문(坤寧門), 천일문(天一門), 흠안전(欽安殿), 승광전(承光殿), 순정문(順貞門), 신무문(神武門) 등 주요한 궁전과 궁문이 나란히 세워지고, 그 가운데 오문(午門)과 신무문은 자금성의 남북 성문을 이루고 있다.
또한 자금성의 동서 양측에도 동화문(東華門), 서화문(西華門)이 있다.
중추선의 좌우양측에는 각각 대칭되게 회랑이 줄지어 있고, 크고 작은 전당과 누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배열이 정연하고 통일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또한 변화가 풍부한 것이 많다.
자금성은 청대에 거듭된 화재로 전소가 되었는데, 여러 차례 보수한 결과 기본적인 모습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자금성은 외조(外朝)와 내정(內廷)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건청문 앞의 조그만 광장을 경계로 광장이남은 외조 부분으로 태화전, 보화전, 문화전(文華殿), 무영전(武英殿)등이 세워져 있고 주로 조정이 각종의 의식을 여는 곳이다.
광장 이북, 건청문에 들어서고 나면 내정 부분에 속하는데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어화원(御花園), 동육궁(東六宮), 서육궁(西六宮), 자녕궁(慈寧宮), 영수궁(寧壽宮) 등을 포함하여 황제가 일상의 정무를 행하는 곳과 거주하는 곳, 그리고 황후ㆍ비, 어린 황자(皇子)와 황녀(皇女)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자금성은 크게 다음 세 가지의 흥미로운 특색을 갖고 있다.
첫째, 웅대하고 다양한 색채를 가진 궁전식의 건축물 자체가 위대한 예술품이라는 것이다.
일단 그 가운데에 몸을 두면 마치 신화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고, 모두가 사람들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다.
둘째, 명(明), 청(淸)의 궁정생활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역사적 유적이다.
태화전, 중화전,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양심전(養心殿), 서육궁 등의 실내진열은 모두 청궁(淸宮) 내의 모습 그대로를 전하고 있다.
역대 황제나 황후, 황비와 궁녀들이 여전히 생활하는 곳 같은 느낌이 든다.
셋째, 풍부한 고대 예술품과 공예품이 진열되어 있다.
역대 예술관, 회화관, 명각관(銘刻館), 청동기관, 도자기관, 진보관(珍寶館), 시계관 등의 전시실에서는 중국의 유구한 문화를 접할 수 있다.
 
만리장성 (萬里長城,)
장성은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에 이르며, 지도상의 총 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5,000km에 이를 것이다.

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의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연(燕)ㆍ조(趙)ㆍ위(魏)ㆍ초(楚)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하였다.
BC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자, BC 214년에 그때까지 연ㆍ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ㆍ개축하여,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서 황허강[黃河]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陰山]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흉노(匈奴)에 대한 방어선을 이룩하였다.

다시 한대(漢代)에 이르러 무제(武帝)는 BC 2세기 말에 영토의 서쪽 끝인 둔황[敦煌] 바깥쪽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장성을 연장하였다.

진ㆍ한 시대의 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거란(契丹)ㆍ돌궐(突厥)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즉, 북위(北魏)는 5세기 초에 장성을 보강하고, 중엽에는 수도 평성(平城) 부근에 또 다른 성벽을 구축하였다.

또, 북제(北齊)는 6세기 중엽에 오늘날의 다퉁[大同] 북서쪽에서 쥐융관[居庸關]ㆍ산하이 관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하고 다시 뒤이어 현재의 네이창청[內長城]에 해당하는 곳에 중성(重城)을 구축하였다.

한편,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ㆍ산시성[山西省] 경계 북부를 타이항 산맥[太行山脈]을 따라 남하하는 장성도 북주(北周) 방어대책으로 그 무렵에 축조된 것인 듯하다.

그 후 수(隋)나라는 오르도스[鄂爾多斯] 남변에 장성을 구축했고,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는 장성의 훨씬 북쪽까지 그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또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대(明代)에 들어와서였다. 영락연간(永樂年間:1403∼1424)부터 보강이 시작되어, 정통연간(正統年間:1436∼1449)에 내장성이, 성화연간(成化年間:1465∼1487)에 오르도스 남변의 장성이 수축(修築)되고, 다시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는 동쪽 일대의 장성이, 15세기 중엽∼16세기 초엽에는 오르도스 서쪽 끝에서 란저우[蘭州]를 거쳐 자위관에 이르는 장성이 완성되었다. 명(明)나라는 이 장성지대를 9개의 군관구(軍管區)로 나누어 구변진(九邊鎭)을 두고, 장성을 통과하는 교통요지, 즉 옌먼관[雁門關]ㆍ쥐융관ㆍ구베이커우[古北口]ㆍ장자커우[張家口] 등지에는 견고한 관성(關城)을 설치하였다.

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의를 상실하고, 단지 중국 본토와 둥베이[東北:만주]ㆍ몽골 지역을 나누는 정치ㆍ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편, 축성의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전(塼)ㆍ돌 등이며, 성벽은 높이 6∼9m, 폭은 상부 4.5m, 기부(基部) 9m이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화원 (和園)
북경시 북서부에 자리한 이화원은 북경지구에서 지금까지 규모가 제일 크고 제일 완전하게 보전된 황실원림이며 또한 중국 고전원림의 본보기로 손꼽힌다.
이화원은 주로 만수산과 곤명호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진 면적이 290만㎡에 달하며 그 중 곤명호가 약 3/4을 차지하고 있다.
만수산의 본명은 옹산이었고 북경 서산의 지맥으로 실은 높이가 60m도 안 되는 작은 산이다.
옥천산의 샘물이 흘러내려 옹산앞에서 호수를 이루고 호수가 북경시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서호라고 부렸었다.
일찍이 12세기에 금대의 장종이 이곳에 행궁을 지었고 명대에 또 원정사, 호산원 행궁을 건조하였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중국 고전원림 건축은 역대 왕조의 조원 실천을 거치고 역대의 예술성과를 승계 및 종합함으로써 그 수준이 최고에 이르렀고 황실원림의 건설도 전성기에 들어섰다.
건륭연간(1736년~1795년)은 청대의 통치정권이 비교적 안정된 시기여서 "건륭성세"라고 불리었다. 이 시기 옹산 부근에는 이미 여러 곳의 대규모의 황실원림이 건조되었다.
1750년 건륭제는 생모 뉴후루씨 효성 황태후의 환갑을 기념하여 청의원을 건조하도록 어명을 내리고 원정사가 있던 자리에 대보은연수탑을 건립하게 하였으며 그 이듬 해에는 옹산을 만수산, 서호를 곤명호로 개칭했다.
청의원공사는 무려 15년이 걸렸다.
건축면에서 청의원은 중국 북방원림의 웅대한 기상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강남 정원의 수려하고 다채로운 모습을 겸비하였으며 또한 북경시구 북서쪽 교외의 황실원림을 한데 이어놓아 하나의 완전한 원림시스템을 구성함으로써 유명한 "3산 5원", 즉 창춘원, 원명원, 향산 정의원, 옥천산 정명원, 만수산 청의원을 형성하였다.
1885년 자희태후는 해군 경비를 유용하여 청의원 보수공사를 개시하고 청의원을 이화원으로 개칭하였다.
1900년 이화원은 재차 8개국 연합군의 파괴와 약탈로 인하여 만은 문화재와 시설이 약탈당하고 건물도 파괴되었다.
이때는 청왕조가 몰락하는 시 기었으므로 1902년 자희태후는 전산과 원내의 동쪽부분만을 재보수하였다.
이화원은 각 부분의 기능에 따라 정치활동구역, 황제와 황후 생활구역, 궁경유람구역 등 3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이화원 동부에 자리한 정치활동구역은 외관이 장중하고 실내 장식이 화려하다.
이곳은 청대 황제가 원내에서 조정의 정무를 처리하던 장소이다. 인수전을 정전으로 하여 동궁문. 인수문 및 인수전 양편의 조방 등 주요 건물이 있다.
정치활동구역의 바로 옆에 있는 건축군은 청대의 황제와 황후들이 이화원에 와서 놀며 거주하던 중요한 장소이다.
낙수당을 중심으로 덕화원, 옥란당 등 주요 건물이 있으며 만수산 전산의 건축군은 이화원의 정화부분이다.
배운전, 불향각, 지혜해 등으로 구성된 중축선의 건축물 양쪽에는 전륜장, 오방각, 보운각이 부수되어 산세를 따라 건조되고 전원을 통수하는 주요 경관군을 형성하였다.
이화원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불향각은 총 높이가 약 40m이며 3층, 4겹 처마, 8각형의 목조 누각으로 밑부분은 한백옥 수미좌로 되어 있고 또 그 아래는 20m 높이의 거석을 다듬어 쌓은 네모난 대가 이 방대한 체적의 누각을 산허리에 받치고 있다.
곤명호 호수구역의 서부에 하나의 긴 언제와 하나의 작은 언제가 곤명호 세 부분으로 나누어 놓고 매 부분의 수역에는 작은 섬이 하나씩 있어 "1지 3산"의 선국경계를 이루고 있다. 호수 위의 건물은 풍격이 서로 다르며 자태가 뛰어나고 계절에 따라 경치가 변한다.
주요 경관으로는 항주 서호의 소제와 6교을 모방하여 설계한 서제와 6교, 동제와 남호도를 연접한 17공교, 곽여정, 용왕묘, 문창각, 경명루, 함허당 등이 있다.
이화원은 중국이 창건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으며 1951년부터 중국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금을 투입하여 보수작업을 행함으로써 원내의 대부분 전당과 유람구역이 모두 당년을 모습을 되찾게 되었고 이 황실 원림의 우아한 경관 배치가 재현될 수 있도록 하였다.
1961년 중국 국무원은 이화원을 전국 중요 문화재 보호대상으로 공포하였고 1998년 이화원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었다.
 
명13능((明十三陵)
북경 창평구 군도산 남쪽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명 13릉은 명대(1368년~1644년)의 13명 황제의 능묘군이다.

이곳에는 또 23명의 황후와 1명의 귀비가 묻혀있다.

명대는 1409년에 이미 오늘의 창평에 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며 1644년 명왕조가 멸망하기까지 13릉의 영조공사는 무려 200여 년이 걸렸다.
명 13릉은 현재 중국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제왕능침이 제일 많은 황릉 건축군 이다. 능침구역은 삼면이 산에 둘러싸이고 중간은 둘레가 약 40㎢되는 작은 분지로서 자연적으로 봉쇄된 양상이며 남쪽으로 북경과 접해있어 능구의 천연문호이다.

13개의 능묘는 분지의 동. 북. 서 3면에 분포되고 제각기 산봉을 하나씩 등지고 있다. 처마가 높이 들리고 보성이 높이 쌓여 있어 나름대로 유궁을 이루고 있다.

능묘군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면서도 또 각기 자체의 규모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장릉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으로는 헌릉(인종), 경릉(광종), 유릉(영종), 무릉(헌종), 진릉(효종), 강릉(무종), 정릉(신종), 소릉(목종), 사릉(사종)이 차례로 있고 오른쪽으로는 경릉(선종), 영릉(세종), 덕릉(희종)이 차례로 자리해 있다.

13개 황릉의 형상과 구조는 기본적으로 같아 모두 담장이 둘러져 있고 중축선위에 능문, 능은전, 영성문, 석오공, 명루와 보성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다.

천수산 주봉의 남쪽기슭에 자리한 장릉은 명대의 세번째 황제인 성조 주체와 황후 서씨가 합장된 능침이다.

명대 13릉 가운데 시간이 제일 오래 걸리고 건축규모가 가장 크며 지상 건물이 제일 완전하게 보전된 능묘로 기본적으로 원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장릉의 주 건물은 능은전으로 1427년에 건조되었는데 명대의 황궁 금남전을 모방하였고 면적은 1,956㎡로 중국 최대의 목조 고건물이다.

장릉은 북경 고궁의 태화전. 산동 곡부 공묘의 대성전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전각으로 불리고 있다.
정릉은 명대의 열세번째 황제 주익균의 능묘이며 중국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제왕능묘이다. 중국이 창건된 후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1956년에 정릉을 공식 발굴하였다.

정릉은 건조된지 4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견고하다. 지하궁전은 길이 27m, 총 면적 1,195㎡, 벽돌과 돌로 건조된 아치형 건축물로 묘실은 5개의 전당이 서로 이어져 있다. 지하궁전에서는 각종 문화재 3,00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제후들이 생전에 사용하였던 일용기물과 복식이 많다.

출토된 금관과 봉관은 유달리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 중에서 제일 무거운 봉관은 무게가 2.905g에 달하고 5,449개의 진주와 128개의 보석이 박혀있다.

이밖에 정교하게 제작된 금술 주전자, 옥잔, 옥사발, 청화자기, 삼채자기화로 등은 모두 보기 드문 진품으로 당시의 최고 공예수준을 보여준다.

명 13릉은 1957년 북경시 정부로부터 중요 문화재 보호대상으로 선정되었고 1961년 국무원에 의하여 전국 중요 문화재 보호대상이 되었다.

195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는 동안 장릉. 정릉. 소릉과 신도는 잇달아 문화재관광지로 개발되어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봉건 황제들이 백성의 출입을 금지하였던 능원이 오늘날 관광지가 되었다.

관광객들은 또 13릉 저수지. 정릉박물관. 명대 황제 밀랍소상관. 구룡유락원 등 경관을 참관할 수 있다.

명 13릉은 2003년 <세계유산 목록>에 수록되었다.
 
천단(天壇 )
천단은 중국에서 현존하고 있는 가장 완전하고 규모가 가장 큰 제사행사 건축군 이다.

천단은 기원 1420년에 건설이 시작된 후 명ㆍ청(기원1368년-1911년) 두 조대 황제들이 천지지신에게 제를 지냈던 곳이다.

천단은 베이징 유명한 자금성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이 자금성의 4배나 된다.

천단의 제일 남쪽은 방형의 담장을 둘러 지(地)를 상징했고 제일 북쪽은 반원형으로 하늘을 상징한다.
천단은 내단과 외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천단의 주요 건축물은 주로 내단의 중축선의 양 켠에 집중되어 있으며 남에서 북으로 환구(圜丘), 황궁우(皇穹宇), 기년전(祈年殿)으로 나뉜다.

3층으로 된 원형의 환구는 황제가 천제를 거행하는 중심장소이다.

황제의 천제행사는 예법이 엄격하며 매년 음력 동지 (12월22일 전후)의 여명 전에 거행되는데 황제가 친히 행사를 진행한다.

천단의 다른 하나의 제사건축으로는 기년전이며 이는 세 층의 처마로 된 원형궁전으로 3층으로 된 원형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이는 황제가 매년 여름이 되면 풍년을 기도하는 곳으로 기년전의 건축은 농업문화와도 연관된다.

궁전의 통천주(通天柱)는 춘, 하, 추, 동 사계절을 대표하고 중국인들이 하루를 12개 시간단위로 계산하기에 제1층 처마를 받치고 있는 12개 기둥은 12개 시간단위를 대표하며 가운데의 12개 기둥은 12개월을 또한, 24개의 기둥을 합쳐 24절기를 상징한다.

천단은 환구와 기연전 주건축 외에도 서쪽 문내의 신락서()와 희생소(牲所)가 있다.

1998년 천단은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됐다.
 
주구점 북경유인원유적지(周口店北京猿人)
주구점의 <베이징인>의 유적지는 베이징시 서남의 48킬로미터 떨어진 방산구(房山) 주구점촌의 용골산(骨山)에 위치해 있다.

주구점 부근의 산지는 석회암이 많아 수력의 작용으로 크고 작은 천연 동굴을 형성했다.

산 위에 동서 길이가 대략 140미터 되는 천연 동굴이 있는데 <원인동굴(猿人洞)>이라고 불려왔다.
1929년 이 동굴에서 처음으로 고대 인류 유물이 발견된 후부터 <주구점의 첫 번째 지점>으로 불리 우고 있다.

주구점 유적지 지역은 중국 화북지역의 중요한 구석기시대 유적지로서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주구점의 첫 번째 지점인 <베이징인>의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는 1921년 스웨덴 학자 안더손으로부터 처음 발견되었고 그 후 또 많은 학자들이 계속 발굴했다.

1927년 캐나다 학자D. 블랙이 주구점의 유적지에 대해 정식 발굴을 진행하면서 주구점에서 발견된 3매 사람의 이(齒)를 <중국원인 베이징종()>이라고 정식 명명했다.
1929년 중국 고고학 학자 배문중(裴文中)은 발굴 중에 <베이징인>의 첫 번째 두개골을 출토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주구점 유적지는 80 여 년간 지속적으로 발굴해 왔으며 첫 번째 지점을 이미 40 여 미터 발굴했지만 이는 동굴의 절반에 그친다.

주구점의 첫 번째 지점에서 불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어 인류의 불 사용의 역사를 앞당겼다.

유적지에서 5개의 잿더미 층, 3곳의 잿더미와 불에 탄 많은 뼈를 발견하였으며 잿더미 층의 제일 깊은 두께가 6미터에 달했다.

이런 유적은 베이징인이 불을 사용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불씨를 보존할 줄도 알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한 유적지에서 많은 돌제품이 출토 되었고 돌제품의 대부분은 소형석기로 되어 있으며 석기 종류가 아주 많다.

출토물에 근거하여 베이징원인은 대략 지금까지 70∼20만년전의 시기에 주구점 지역에서 거주했고 채집을 위주로 하고 사냥을 보조로 하는 생활을 했음이 증명 되었다.

그 초기가 지금으로부터 70∼40만년 전, 중기가 지금으로부터 40∼30만년 전, 말기가 지금으로부터 30∼20만년전이 된다.

베이징원인은 고대 원숭이로부터 호모사피엔스(智人)에 이르는 사이의 원시 인류로 베이징인의 발견은 오늘 생물학, 역사학과 인류 발전사의 연구에 아주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주구점 베이징인은 1987년 12월 《세계 유산목록》에 수록됐다
 
승덕 피서산장(承德避暑山莊)
승덕 산장을 "열하행궁" 훅은 "승덕이궁" 이라고 한다.

청나라 강희제 때 세워진 궁으로 북경의 이화원 보다 넓은 1백 70만 평의 넓이다.

강남의 풍경을 모델로 하여 강희 40년(1703년) 에 공사를 시작하여 건륭 55년(1790년)에 완공됐다.

역대 황제의 대부분이 북경의 더위를 피해 내년 4월에서 9월까지 6개월 동안 이 곳에서 정무를 집행하였기 때문에 제 2의 정치의 중심지라고도 하였다.
피서산장은 궁정, 호수, 평원, 산지 등 네 구역으로 나누어 지는데 대부분이 산지이고 나머지가 평야와 호이며, 총 길이 약 10km에 이르는 궁궐 담장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이 가운데 평원 구역은 황제가 야외 연회를 베풀거나 사냥을 하던 곳이며 호수 구역은 강남지방의 풍경을 모방한 것이다.

호수 가운데에는 동해의 신선봉을 본뜬 3개의 섬을 쌓았으며 섬과 호숫가를 둑으로 연결해 놓았다.

섬 위에는 궁전이 있고 호반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동궁 북쪽 수문 위, 하호[下湖]와 은호[銀湖]를 잇는 수로의 돌다리 위에는 3개의 정자가 있다

궁전구(宮殿區)에는 단보징청뎬[澹泊敬誠殿]을 정전(政殿)으로 하는 정궁과 쑹허자이[松鶴齋], 완뤠쑹펑[萬叡松風], 동궁(東宮) 등의 건물이 있고 호수구에는 6개의 호수(창건 당시는 8개)가 있다.

피서산장에 들어서면 성벽의 일부인 정문에 여정문(麗正門)이라고 한자로 쓰여 있으며, 또 왼쪽에서 오른쪽 으로는 몽고어, 위구르어, 티벳어, 만주어로 정문임을 알리는 글이 쓰여 있다.
내오문을 통해서 피서산장에 들어서면 웅장한 담박경성전(澹泊敬誠殿)이 버티고 있는데 이곳은 소수민족의 사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다.

최고의 건축용 목재인 나무로 지은 것으로 지은 지 20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향기가 가득하며, 바닥은 중국 남부의 대리에서 운반해 온 대리석으로 깔려 있다.

피서산장의 동쪽에서 북쪽으로 걸쳐, 8개의 절이 퍼져 자리잡고 있는데,이들을 외팔묘라고 부른다.

원래는 강희 52년(1713년)부터 건룡 45년(1780년)에 걸쳐 지은 것으로 12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8개만이 남았다.

이 절들은 대개 변방에 있는 소수민족을 종교적인 융화정책으로 회유하기 위한 정책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변방의 풍취가 풍긴다.

1994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2. 중국 경제의 심장, 상해(上海)

 

 - 면 적 : 6,341㎢

 - 인 구 : 약 2,000만 명


상해의 면적은 6340평방 킬로미터로서 서울 605 평방킬로미터의 10배에 달한다. 그러나 중국의 광역시 개념은 우리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이어서 실제의 시가지 면적은 서울과 비슷하다. 상해는 명실공히 아시아 경제의 중심지이다. 세계 500대 기업 중 300개 이상이 상해에 진출해 있으며 이중 145개가 포동(浦東)에 위치해 있다. 시티뱅크, 필립스, 코가콜라 등의 중국본부를 홍콩에서 상해로 옮긴 다국적 기업은 70여 개에 달하고 KFC의 경우는 헤드쿼터를 상해로 옮기려 하고있다. 상해가 없는 중국은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중국 경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국의 핵심이다. 그러나 상해의 금융시장은 아직 초기단계에 놓여있어서 홍콩의 수준에 다다르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상해의 우위는 과학기술과 교육, 그리고 공업기초가 비교적 두텁다는 것이다. 양자강 유역은 중국에서 물자가 가장 풍부한 곳이며 내부확산 작용에서 상해는 그 중심의 위치를 십분 활용 할 것으로 보인다. 상해가 한층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홍콩의 도움이 필요하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상해의 인재와 자금이 홍콩으로 유입되어 홍콩의 발전과 번영을 이루었다. 지금은 홍콩의 기술과 자금이 역으로 상해의 발전을 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홍콩의 높은 물가와 임금은 여러 가지 기능을 상해로 이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상해는 2010년 엑스포를 유치하면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상해는 극동아시아의 경제 중심이었다. 당시 금융과 경제적 지위는
아시아의 어떤 도시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교통 수송방면에서도 상해는 필수 불가결한 요충지였다.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과거의 위치를 간단히 되찾기는 어렵겠지만 중국의 발전과 지위 향상은 다시 상해에게 여전의 영광을 돌려줄 것 같은 분위기이다.


3. 북경의 그늘에 가린 대도시 천진(天津)

 

 

 

 - 면 적 : 11,300㎢

 - 인 구 : 약1,200만 명


천진은 북경, 상해와 더불어 중국의 3대 도시 중 하나이며 수도의 외항으로서 기능과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하는 직할시의 하나이다. 북경과
중국을 알면 미래가 보인다. 마찬가지로 자원은 빈약하지만 화북지역의 경제발전에 견인차로 꼽히고 있는 곳이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로 일찍이 양국수교 이전부터 인천과의 교통이 발전하였고 해운, 항공 면에서 한국과 가장 먼저 관계를 맺은 도시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의 많은 제조업이 천진의 개발구로 앞 다투어 생산시설을 이전하고 있으며 수도 북경에 존재할 이유가 없는 업체들은 상대적으로 토지사용료나 고정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천진이 업체들을 유치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전통적으로 ‘짠돌이’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천진 사람들은 북경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북경과 구분되는 성격과 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왔으며 현재 수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진이 그 규모나 잠재 능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는 이유는 북경과 너무 근거리에 있다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북경은 현재 상해와 경
쟁적인 몸집 불리기에 몰두한 나머지 북경을 전체 4환(環)에서 5,6환(環)까지 확장하는 대북경(大北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6환까지 북경이 확장되면 실제로 천진입구까지 북경이 커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북경과 천진은 한 도시로 묶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천진 사람들은 이러한 추세를 우려하고 있고 안
그래도 북경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북경으로 흡수되는 상황을 크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천진은 전형적인 공업도시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한 관광지도
문화 유산도 별로 없다. 그러한 이유에서 천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북경으로 휴일 나들이를 가는 일이 많다고 한다.

 

 - 주요 관광지


4. 내륙의 유일한 직할시, 중경(重慶)

 

 - 면 적 : 82,000㎢

 - 인 구 : 약3,600만 명


어디에나 자전거의 물결이 넘치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예외였던 도시가 바로 중경이었다. 도시 전체가 구릉으로 이루어져있고 험한 산 위에 형성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부시절 잠시 임시수도로서의 기능을 했던 중경은 오랜 시간동안 전혀 주목 받지 못하는 사천성의 제2도시였다가 1997년 직할시로 승격이 된다. 직할시로 승격이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세계최대의 규모인 장강삼협(長江三峽) 댐 건설의 전초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해와 일직선의 수로를 형성하게 되는 장강삼협댐은 장차 철도8개 맞먹는 기능을 하게 된다는 전망이다. 그러나 지금의 댐 건설을 거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라는 평을 듣고 있으며, 최근 사천성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수해들이 자연의 섭리에 역행하는 댐 건설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2009년에 완공되기로 한 삼협댐은 단순한 댐 건설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수몰지역의 100만 이주민에게 생활의 터전과 생계를 중경 직할시 정부가 거의 다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을 주고 있다. 면적으로 따지면 중경은 중국 제1의 도시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중경을 중국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부르지 않는다.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 시가지에서 변두리로 나가려면 15시간 씩 걸린다. 면적이 82000 평방 킬로미터나 되는데다 산 위에 도시가 위치하다 보니 길을 닦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부 물류의 중심으로 성장하겠다는 중경의 목표가제대로 실현될지는 의문이라고 하겠다.
중경은 중국에서 여름 날씨가 제일 더운 3대 도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매운 사천 요리의 본고장으로 유명하기도 한데, 겨울에는 영하로 떨어지지 않지
만 안개가 가득하고 습하여 견디기 힘든 겨울 날씨가 매운 음식을 만들어 내게 했다고 한다.


TIP: 등 소 평이 심천(深□), 주 해(珠海), 하문 (廈門)을 경제특 구 로 지정한 것은 홍 콩 , 마카오 ,대만의 자본 을 흡 수 하여 발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실제 화상(華商)의 경제 실력은 웬만한 국가를 능 가한다. 중 국 이외에 거주 하는 화교 는 모 두 5600만 명 정도 이며 아시아의 1000대 기
업 중 517개가 화교 자본 기업이다. 중 국 의 경제특 구 들 은 화교 자본 의 힘을 빌어 중 국 에서 제일 먼저 발달하였다.

 

 - 주요 관광지

 

중경 대족석각 (大足石刻)
중국 중경시에 위치한 대족석각(大足石刻)은 9세기부터 13세기 사이의 대량의 마애(摩崖)조상(造像)석굴 예술을 보존한 것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원 3세기 전후 불교가 동쪽으로 전파됨에 따라 고대 인디아의 석굴 예술이 중국에 전해졌다.

기원4세기와 7세기 전후 중국 북방에서 두 차례의 불교조상(造像)고봉이 형성되었다.

이 두 차례의 조상 고봉은 후세들에게 두 개의 세계유산을 남겨주었다.
이 두 차례의 조상 고봉은 후세들에게 두 개의 세계유산을 남겨주었다.

그 중의 하나는 중국 조기석굴예술을 대표하고 있는 산서(山西) 대동(大同) 운강석굴(雲岡石窟)(기원4세기부터 5세기까지)이고 다른 하나는 중기 석굴예술을 대표하고 있는 하남(河南) 낙양(洛暘)용문석굴(龍文石窟)(기원6세기부터 9세기까지)이다.

대족석각은 중국 만기 석굴예술의 특출한 대표 작품이다.

대족석각은 중국 서남부에 있는 중경시(重慶市) 대족현(大足縣) 등 여러 현내에 위치해 있다.

지리적 구조의 원인으로 하여 이곳은 <석각지향>(石刻之鄕)이란 미명을 가지고 있다.

대족석각은 최초 기원649년에 새겨졌는데 흥성기는 기원9세기부터 13세기 중엽까지 이 다.

6-7백 년 사이 대족석각은 지속적으로 늘어나 나중에 규모가 방대한 석각군으로 형성되었다.

대족석각군은 70여 개 지점에 분포되어 있는데 도합 10만여 존의 석각조상이 있다.

그 중에서 북산(北山)과 보정산(寶頂山), 남산(南山), 석전산(石篆山), 석문산(石門山)의 석각조상이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다.

기타 석굴예술과 대비해 볼 때 대족석각은 두 가지 현저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특색은 운강석굴이나 용문석굴이나 할 것 없이 조상은 거의 다 불교인물을 위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대족석각은 중국본토의 종교인 도교와 공자가 창립한 유가의 대표인물을 불교인물과 나란히 나열했다.
석전산마애조상은 중국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를 주존(主尊)으로 하는 유가조상으로 석굴예술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불교와 도교, 유교 삼교 인물조상이 한 석굴에 함께 있는 것은 중국 석굴예술에서 극히 보기 드문 것이며 이 모든 것은 중국문화 역사에서 유교와 도교, 석가모니가 장기적으로 싸우면서도 융합하는 변천사를 구현하고 있다.

대족석각의 다른 특징은 그 선명한 세속화와 생활 특징이다.

이것은 석굴예술에서 유일한 것으로 그 당시 중국 사회시민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아 대족석각은 그 내용과 표현수법에서 세속생활과 심미적 정취와 긴밀히 결합하였다.

그 결과 대족석각은 기원12세기부터 13세기 중엽 사이의 민간풍속화랑으로 간주된다.

1999년 중경 대족석각은 정식으로 <세계문화유산명록>에 등재되었다.

◈ 주변명소

비파산공원(枇杷山)
비파산은 해발 280미터 정도로 중경 중심부 중에서는 지대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중경
시 중앙에 위치한 공원으로 특별한 매력은 없지만, 정상에서 중경 시가를 내려다 볼 수 있
다. 그러나 나무에 가려 일부분밖에 못본다는 아쉬움이 있다. 공원 후문 바로 아래는 중경
박물관이다.

장강삼협(長江三峽)

* 중국최대의 하류로서 세계 3대 하천인 양자강을 따라 만현, 삼협, 의창, 형주, 사시, 무
  한을 경유하여 구강에 이르는 코스를 장강 유람이라 한다. 하지만 관광객은 5일이 넘는
  전체 코스가 너무 길어서 중경에서 사시까지, 또는 의창까지의 유명한 장강 삼협만 보는
  경우가 많다. 구당협, 무협, 서릉협으로 이루어진 삼협은 삼국지의 주무대였고 이백, 두
  보, 소동파 등이 시의 소재로 삼기도 했던 곳이다 중경에서 배를 타고 가다 보면 우선 만
  현이 나오는데, 이곳이 태백암에서 이태백이 독서를 했다고 전한다. 백제성은 25년 공손술
  이 쌓은 성으로 후일 유비가 제갈량에게 아들을 부탁하며 죽은 곳이기도 하다. 주변이 삼국
  시대의 주요한 격전장이었음을 말해 주듯이 백제성 맞은편에는 허물어진 성터가 아직도 남
  아있다. 우람하고 험준한 구당협부터 장강삼협은 시작된다. 물살이 빨라 이곳을 지나는 물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 같고, 산봉우리가 하늘에 닿고 배가 땅굴 속을 지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구당협 양쪽 절벽에는 맹량제라는 갈지자형의 돌구멍이 있는데 산 어리기까지 뚫려
  있다. 용문협은 높고 웅장하여 여울이 많은데 그 중 은하탄이 가장 아름답다. 여울 길이는
  3백 미터도 안 되나 탁차가 10미터나 되어 마치 눈송이 같은 물보라가 생긴다. 파무협은 기
  기묘묘한 바위산의 모습이 볼 만하고, 적취협에서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놀란 원숭
  이가 뛰어다니며 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요점정리 ⊙


1. 북 경은 천년고 도 로 서 역사, 교 육 , 정치의 중 심으 로 자리를 지켜왔다. 중 앙계획경제가 아닌 지금 은 경제의 중 심으 로 서의 기능 은 약화되었지만 수도  로서의 위상은 변함없다.
2. 상해는 중 국 경제의 중 심으 로 서 미래의 발전을 이끌 견인차이며 과거 아시아 경제 중 심으 로 서의 위치를 회복 해가고 있고 홍 콩 의 일부 기능 을 이어받고 있다.
3. 천진은 화북 지방 경제의 중 심지로 서 요 충 지의 역할을 하고 있으 나 북 경의 그 늘에 가려 실제가치보 다 낮게 평가 받고 있다.
4. 장강삼협 댐의 건설은 중 경을 제4의 직할시로 승 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 댐 건설에 전력을 다하는 관계로 동 부 연안의 상해 등 대도 시가 부 양하는 형태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