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판파전투
이번에는 연의,정사를 구분해서 올리겠습니다.
정사: 가문을 계승하여 조조에 대해 대항의사가 있었던 유종은 부선(傅巽)의 진언에 따라 조조가 신야에 도달하자 항
복했다. 번성(樊城)에 주둔하던 유비는 샹양(襄陽)으로 향했다. 제갈량(諸葛亮)은 유종을 공격하여 형주를 지배
하자고 진언했으나, 유비는 유표의 은혜를 생각해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유비는 유종을 불렀으나 유종은
두려워하며 나가지 않았다. 유종의 측근 및 다수의 형주사람들은 유비에게 귀순했다. 10여만의 사람들이 유비을
따라 움직였기에 유비는 하루 10여리밖에는 전진하지 못했다. 여기서 유비는 관우(関羽)에게 수백척의 배에 그
들의 일부를 탑승시켜 강릉(江陵)으로 보내었다.
조조는 유비가 군수물자가 풍부한 강릉을 점거하는걸 두려워해 수송부대을 후방에 배치하고 신속하게 양양을
점거했다. 조조는 조순(曹純), 문빙(文聘)에게 기병 5천을 주어 급히 유비를 추격하게 하였고, 이들은 당양현 장
판에서 유비일행을 급습하게 된다. 유비는 처자을 버리고, 제갈량과 함께 수십기의 병력만을 데리고 도주했다.
조운(趙雲)은 몸에 아두(阿斗;후에 유선(劉禅))을 안고, 감부인을 보호해 유비를 쫓았다.
장비(張飛)가 후군을 맡아 20여기을 이끌고 강을 방패삼아 다리를 끊어버리고 [나는 장익덕이다. ]라고 외쳐 조
조군은 누구도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장비의 활약으로 유비는 도주에 성공했다.
유비는 한진(漢津)에서 관우가 이끌던 선단을 만났고, 또한 유표의 장남으로 강릉태수인 유기와 만나 함께 하구
(夏口)에 도달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오나라에 파견해 손권(孫権)과 동맹을 맺었다. 손권은 수만명의 군대를 파
견해 유비와 함께 적벽(赤壁)에서 조조군을 격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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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당시 선대 유표의 비호하에 있으면서 객장(客将)으로써 신야를 수비하던 유비는 유종의 항복으로 인해 최전선에
서 고립되게 되었다. 이것을 호기로 본 조조군의 공격 앞에 앞뒤가 포위된 신야는 풍전등화가 같았다. 맹렬한 기
세로 남하한 조조군의 선봉은 맹장 조인(曹仁)과 조홍(曹洪)이 맡아, 유비가 도망쳐 수비병도 산산히 흩어져 문
자 그대로 텅빈 성이 된 신야에 의기양양하게 입성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비휘하의 참모 제갈량의 계략이었다.
사전에 계책을 내어, 교묘하게 빈성으로 위장한 신야성으로 유인된 조조군은 성안의 복병과 만나 혼란에 빠져
보기좋게 격퇴되고, 기세가 둔화된 조조군은 일시 후퇴했다. 유비는 조조군을 일시에 후퇴시켰지만, 계속해 제2
파, 제3파에 대해 신야의 수비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조조군의 재침입하기 전에 신야를 버리고 함께 유종령으
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가문을 계승한뒤 조조에게 대항할 의사가 있던 유종도 도망친 형 및 선대로부터 형주의 양도를 권고받았던 객장
유비의 동향을 생각하고, 조조에게 귀순할것을 주장한 공신 괴월 및 한숭, 채모에게 설득되었다. 결국 조조진영
이 전선의 신야을 함락시키자,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할것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형주의 패권은 조조
의 손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비는 먼저 신야 배후의 번성에 들어간 후, 유종의 거성이자 형주통치의 거점인 양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성 부
근에 도달할때쯤 성의 장수 장윤이 쏜 화살로 인해 유종이 입성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유종휘하의 장
수이며 친유비파 무장인 위연이 문을 열려고 했기에 성안에서 작은 다툼이 있었다. 한편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
한것을 알게된 유비는 진퇴양난에 빠져 제갈량과 막료들과 함께 대응을 모색해 제갈량의 진언에 의해 일단 강릉
을 목표로 나가자고 결정하는 동시에 의동생 관우, 제갈량을 사자로 세워 먼저 강릉으로 파견해 유기의 협조를
구하게 된다.
한편 남하하는 유비일행은 신야에서부터 쫓아온 백성들과 합류했기에 진행이 매우 늦었다. 당양현 장판에 도착
할때쯤 쫓아오던 조조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조조군의 선봉 문빙의 공격과 계속된 조조군의 공격을 유비의
의동생 장비가 후군이 되어 방어했으나, 조조군의 파상공격 앞에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유비는 데려온 백성과
처자들을 버리고, 먼저 후퇴해 세력을 정비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흩어진 휘하장수는 몇명인지 알 수 없고, 참모
미축 및 간옹도 행방이 묘연했다. 여기서 혼란중에 유비의 아내 미부인과 감부인 및 유비의 아들 아두는 위나라
병사에게 생포되었으나, 이것을 본 유비휘하의 장수 조운이 말머리를 돌려 단기로 뛰어들어 부인들을 구출했다.
그후 위나라 장수 순우도에게 붙잡힌 미축과 감부인을 구출해 장비에게 보내고, 미부인과 아두을 찾기위해 다시
조조군 진영에 또 뛰어들었다. 도중에 앞을 가로막는 수명의 조조군의 장수를 죽이면서 돌아다니다가 민가부근
에 쓰러진 미부인을 발견했다. 미부인은 중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어 조운에게 아두를 맡기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조운은 우물을 메우고, 아두를 품에 안고, 다시 조조진영을 돌파해 유비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유비
는 이것을 보고 매우 감격했다. 그후 장판교에서 위세를 떨친 장비의 기백과 제갈량의 계략에 농락당한 조조군
은 추격이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후에 장판파가 불탄것을 보고 유비군의 병력이 적다는것을 알게 된다.
그래도 이것으로 조조군을 일시적으로 묶어두는데 성공한 유비일행은 먼저 보냈던 관우, 제갈량의 수군과 합류
해 장강연안으로 남하했다. 겨우 호랑이입에서 탈출한 유비는 조조에게서 어렵게 도망쳐 하구에 도달한다. 여기
서 유기와 만나고 강남의 영주 손권의 명령으로 형주의 내부사정을 탐색하러 온 노숙(魯粛)과 만나, 이후 사태는
유명한 적벽대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앞서 장판파에서 활약한 조운은 아문장군(牙門将軍)으로 승진해 이후에도
촉나라의 충신으로 활약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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