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四溟大師)를 기리는 표충비각(表忠碑閣)
표충비각 정문 삼비문(三碑門)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번지에 자리 잡은 홍제사(弘濟寺)는 절의 이름보다 사명대사(四溟大師) 땀나는 비석(碑石)으로 세간에 더 알려진 사찰이다. 홍제사는 조선시대에 승병장(僧兵將)으로 유명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기리는 표충사(表忠祠)와 그리고 표충비각이 있어서 이를 보호하고 사명대사의 얼을 기리기 위한 사격(寺格)으로 지어진 절이다.
삼비문(三碑門) 현판
사실 홍제사는 보이지 않는 두 개의 영역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표충비각이 있는 공간과 또 다른 하나는 홍제사 영역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비문(三碑門)을 지나 표충비각을 참배하고 홍제사를 참배한다. 이는 가람의 배치를 설정할 당시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홍제사 영역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배치를 하였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참방 객을 맞이하는 삼비문은 삼비문 맨 안쪽에 자리 잡은 표충비각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표충비각은 다른 비석에는 찾아 볼 수 없는 세 사람의 공훈을 따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삼비문(三碑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화재 공간에 걸맞게 이 현판의 글씨가 누구의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관지(款識)가 없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화장실이 표충비각 공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간 안에 있다는 점도 그리 좋은 점만은 아니다.
표충비각 삼문(三門)
홍제사와 표충비각의 건물 배치는 모두 동일하게 같은 방향인 동향(東向)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표충비각의 영역은 보이지 않게 숨어있는 것은 유교식 사당(祠堂)의 건물 배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사명대사 유적지인 표충비각은 1990년대부터 성역화(聖域化) 작업으로 정비와 보수가 함께 이루어져서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 하였다. 삼문(三門)은 대궐이나 관아 앞에 있는 세 개의 문으로 곧 중앙은 정문 오른쪽은 동협문(東夾門) 왼쪽은 서협문(西夾門)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중앙의 정문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협문(夾門)을 두고 있는 문을 말하는 것이며 유교식 건물이다.
삼문(三門)안으로 보이는 표충비각(表忠碑閣)
불교에서 말하는 삼문(三門)에 대해서 알아보자. 열반(涅槃)으로 들어가는 세 가지 문이 있으니 해탈문(解脫門) 무상문(無相門) 무작문(無作門)이다. 이러한 연유로 불교의 삼문(三門)은 본존불이 있는 본당을 열반(涅槃)이라 비유를 하고 삼문은 거기에 이르는 3단계의 해탈문을 비유한 말이다. 이때의 삼문(三門)을 산문(山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상남도지방기념물 제119호 무안리 향나무
삼문을 지나면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향나무 한그루가 있다. 측백나뭇과 속하는 이 나무는 수관(樹冠)의 모양이 마치 양산(陽傘)을 펼쳐 놓은 듯 한 모습이다. 원래 향나무는 곧게 자라는 특성을 거지고 있는데 이곳 무안리 향나무는 1738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法孫)인 남붕(南鵬)스님이 표충비를 세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심은 향나무이다. 그러므로 수령은 약 300년 정도로 보고 있으며 경상남도 지방기념물 제 119호로 지정이 되어 관리와 보호를 받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표충비각(表忠碑閣)
홍제사와 표충비각이 있는 이 지역은 사명대사의 생가(生家)와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표충비(表忠碑)가 언제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1742년인 조선 영조 18년에 사명대사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사찰로 알려진 것이 정설(定說)로 되어 있다. 그리고 무안면은 사명대사가 창건한 백하암(白霞菴)이었으나 사명대사가 입적을 하게 되자 백화암 자리가 표충사(表忠祠)가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백화암은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인하여 사당이 퇴락을 하게 되자 1710년 숙종 36년에 밀양부사 김창석이 사명대사의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影堂)을 짓고 사당을 정비하였다고 한다.
표충비각 현판(表忠碑閣 懸板)
이후 백하암(白霞菴)과 표충비각(表忠碑閣)은 사명대사의 5대법손인 남붕(泰虛堂 南鵬)스님께서 나라로부터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서 현재의 터에 표충비각을 세우고 백하암이 있던 사당에 홍제사를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홍제사는 표충비각을 수호하는 사찰로 면면이 등화(燈火)를 이어오다가 사명대사의 8대번손인 천유(天有)스님의 주도로 밀양 단장면 재약산아래 영정사(靈井寺)로 옮겨지면서 비각을 보존하기 위하여 삼비문(三碑門)과 지금의 홍제사 가람이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근간에 다시 수리를 한 표충비각의 현판은 세밀하게 보지 않으면 넓은 판자에 수성도료를 이용하여 글을 써놓은 것 같아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다.
1980년대 표충비각(表忠碑閣)
표충비각의 관리는 표충사에서 스님들이 번갈아 오고가면서 관리를 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때에도 스님들이 허물어진 원당과 요사를 헐고 현대식으로 요사를 지어서 포교당으로 삼고 비각을 보존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구연운(具蓮耘)스님이 비각의 관리를 하면서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그 후 거의 폐사지에 가까울 정도로 되었을 때에는 표충비만 남게 되었다. 그 후 1977년에 한월당 동조(漢月堂 東照)스님이 홍제사(弘濟寺)라는 이름으로 중창을 하였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의 도움으로 표충비각을 중수하면서 현재의 가람을 갖추게 되었다.
표충비각(表忠碑閣) 보호기둥
1978년에는 표충비를 보호하는 보호각을 세우고 그 주위로 담장 삼비문 비각을 수호하는 법당을 세웠다. 이후에 연경당 장엽(蓮耕堂 壯曄)스님이 경충당(景忠堂)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홍제사는 1981년부터 이정상(李淨相)스님이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의 도움으로 설법보전(說法寶殿) 사적비 범종각 경충당 요사 등을 세워서 지금 홍제사의 가람의 기틀을 잡았으니 정상스님은 홍제사의 2대 중창주이다. 그리고 표충비각의 기둥을 보면 석주에 사각 홈이 파져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는 석주에 재목을 끼워서 보호각을 하였거나 아니면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던 석주를 표풍비각 보호각에 이용을 하였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석주 바닥을 보면 불교식의 연꽃이 새겨져 있지 않음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나라의 길흉사마다 땀 흘리는 표충비(表忠碑)
밀양의 표충비(表忠碑)는 나라의 중요한 길흉사마다 땀을 흘리는 이적(異蹟)을 발생하여 지금도 세간의 이목을 받고 있다. 갑오동란 이후에도 37회나 흘렸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서 서울을 탈환할 때에는 7말 3홉을 흘려서 현대과학 문명으로도 제대로 규명을 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한다. 8.15광복, 6.25사변, 4.19혁명, 5.16쿠데타, 육영수(陸英修)여사피격, 10.26사태 12.12사태 때에도 어김없이 표충비는 땀을 흐렸다고 기록은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이곳 주민들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영험(靈驗)이라고 생각을 하며 아주 신성시 여기고 있다. 비석의 크기는 좌대석을 포함하여 높이3.9m 비석높이 2.7m 폭93cm 두께54cm이다.
신문(新聞)에 보도된 표충비각 땀 흘렸던 기록
표충비(表忠碑) 송운대사비명(松雲大師碑銘) 拓本
표충비(表忠碑)는 사명대사비(四溟大師碑)라고도 부른다. 사명대사는 임지왜란당시 승병을 조직하고 통솔하면서 왜병을 크게 무찌른 승장으로 아주 유명하다. 스님은 일본에 전쟁 포로(捕虜)로 끌려간 조선인 3000여명을 환국시킨 장본이이다. 이 표충비는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붕(南鵬)스님이 경산에서 돌을 운반하여 세워진 비라고 알려져 있다. 좌대(座臺), 이수, 비개(碑蓋)는 화강암(花崗巖)이며 비신(碑身)은 경주(慶州) 석재인 까만 대리석이다.
송운대사(松雲大師.사명대사)의 비문과 기 비문을 풀이함은 다음과 같다.
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
유명조선국밀양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李宜顯 撰
대광보국숭록대부령중추부사 이의현 찬
嘉善大夫行弘文館副提學知製 敎 金鎭商 書
가선대부행홍문관부제학지제 교 김진상 서
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兪拓基 篆 월
대광보국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 유척기 전
粤我 昭敬大王在有之二十五年에 日本賊이 大擧兵入寇하여 主上이 鄙在西隋하니 凶鋒이 彌滿八路하여 中外食焉者多雉兎逃하고 賊遂肆意蹂躪이라 維時에 松雲大師惟政은 佛者流也라 飛錫入高城하여 諭賊勿嗜殺하니 賊見其儀容 凜然卽起敬하여 戒基徒하니 由是로 領東九郡이 得免屠戮之慘이라 旣而慷槪語諸僧曰 吾等의 優游飮啄은 皆聖恩也라 今國危至此어늘 坐視不救 可呼아하고 乃募衆至數百하여 亟赴順安하니 時에 師之師休靜이 方總諸道僧兵타가 辭以老하고 擧師自代어늘 遂從體察使柳成龍 協同天將하여 破平壤賊하고 隨都元帥權慄下嶺南하여 婁有斬獲하니 進階堂上하고 使隨劉總兵綎하여 入倭營諭意淸正할세 三往三返에 盡得要領이라 正이 門 「朝鮮에 有寶乎아」 曰 「無有오 寶在日本하고 若頭是也라 하니 正이 色沮러라 及還에 上이 召至內闥하여 歷問事情하고 仍 敎曰 「昔에 劉秉忠 姚廣孝는 俱以山人으로 勳在國家 하니 爾若長髮이면 百里之寄와 三軍之命이 無所不可라」한대 師辭以不敢커늘 上亦不屈其志하고 特給武庫鎧杖하여 俾抄擊餘賊이러니 已又助築城埤할세 飭儲胥完保障하고 卽上印綏하여 抗章乞休호대 不許하니라 丁酉에 倭再逞커늘 從麻劉二督府하여 具有勞勩일세 特陞嘉善하여 拜同知中樞하고 辛丑에 又築釜山城하니라 甲辰에 奉國書하고 往日本하니 諸倭 相顧驚憚하여 受約束惟謹이라 還被虜男婦三千餘口하고 復命에 加階嘉義하고 優錫賚以獎之하니라 是後年益老하여 乞骸하고 自雉嶽으로 入伽揶山이라니 至庚戌秋하여 示寂하니 世壽六十七이요 僧夏五十七이라 茶毘之夕에 得舍利一具하여 藏之石鍾하고 建窣堵波하니라 師는 豊川任氏也니 父守成이 娶達城徐氏하여 生師於嘉靖甲辰하니 幼有異質하고 稍長讀書 타가 忽有契悟하여 投黃嶽山薙髮하고 字曰離幻이라하고 才思夙詣하여 爲蘇齋 思菴高峯 霽峰諸名公所賞識하고 與詩人崔嘉運許美叔 林子順 李益之輩로 遊하여 爲詩에 淸酒可觀이라 有泗溟集하여 行于世나 然이나 斯皆師之土苴粃糠이라 余固不足道也오 唯是稟氣豪逸하고 自有達識明智하여 從異敎而不爲其敎所囿하고 出世而懷弭亂之志하며 離倫而篤衛國之誠하고 當賊勢潮驅하여 雰雺迊天일세 忠義鬱律을 不能自禦하여 片言이 折伏群醜하고 尺劍이 建立殊績하니 有不可以談空說幻之一枯禪으로 比而倫之로다 聖敎에 引古英傑策勉者蓋亦深知其抱負之不常則 豈不爲一時之毅夫蓋代之衛男也哉아 嶺南之密陽에 有表忠祠하니 以享師而休師는 以有最初勘難之功하고 靈圭는 以殲賊著烈하여 終又殉節하고 與師並餟이러니 肅宗朝命官供祭需하고 當宁又命給復하니 所以樹風聲勸來後也라 師嘗存髥不去하여 其長이 至帶하니 亦異矣라 今遺像이 留在祠中하니라 余雅不喜爲釋子作文字하여 有來請이면 輒麾之로대 唯師事 跡은 絶奇하여 義難一例斥却일세 遂爲之銘하니 其詞에 曰人有五倫에 一則君臣이로다 臨難奮義에 有國無身이로다 斯爲正理요 名敎攸遵이로다 呪梵持鉢은 佛也匪人이나 獨守공門하여 自甘夷淪이로다 視世危亂하고 寧肯嚬呻가 偉哉松雲은 跡幻心眞이로다 存髥至술하고 有燁精神이로다 想厥雅意호니 不屑緇紳이로다 蠻警卒起에 誓淸氛塵이로다 裒兵選徒에 師律一新이로다 楡岾救衆에 化彼兇嚚이로다 九郡安帖하여 全活惟均이로다 西山讓先하니 困徹重新이로다 歷載從戎에 箕疊鼎津이로다 鹵獲侯多에 特侈緋銀이로다 釜營三返에 尤竭忱恂이로다 說寶語壯에 氣薄秋旻이로다 以舌代鋒하여 遠懾强隣이로다 七年兵戈에 功在南民이로다 聖情眷이하여 諭敎諄諄이로다 曰昔劉姚는 勳比麒麟이로다 爾能屈志하여 佑我昌辰이로다 百里三軍은 嘉命可申하니 師拜稽首하여 其敢逡巡가 臣老無能하여 願垂慈仁이로다 祗林道場에 猿鳥相親이 是臣本懷니 困款畢陳이로다 翩然歸臥에 雉嶽嶙峋이로다 恩槳주疊은 表節之純이로다 毫光遽비하니 法運終湮이로다 塔廟湧공에 玄珠示珍이로다 凝川報祀에 永綏千春이요 遺像在堂하니 爽氣氳氤이로다 給需賜復하니 寵章式頻이로다 惟此一着은 蓋飭戎袀이니 非如前代의 渠敎是因이로다 三師薺享에 共作主賓이로다 酬功彰烈하여 施及無垠이로다 我述其事하여 刻之貞珉이로다 爰俾鶖子로 師義寔循이로다 毋泥虛寂하고 追師濟준하라 崇禎後再壬戌 十月 日立
아~! 우리선조 임금 25년에 일본 놈들이 많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옴으로 선조는 서북 신의주 변방으로 피난하시고 흉봉(凶鋒)이 팔도에 침입함에 안 밖으로 국록(國祿)을 먹는 자들은 꿩이나 토끼처럼 도망하니 적은 드디어 우리나라를 마음대로 짓밟았다. 이때 송운대사 유정(惟政)은 불교를 닦고 있었는데 석장을 집으시고 고성(高城)에 들어가서 적에게 살생을 즐기지 말라고 타이르니 적이 대사의 그 위엄이 늠름하신 것을 보고는 곳 일어나 공손히 절하고 그 무리들을 훈계하니 이로 말미암아 영동(嶺東)의 9군(郡)은 비참을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유정은 강개한 어조로 모든 스님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잘살고 있는 것은 모두 임금의 덕택이며 나라의 위태함이 이에 이르렀거늘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시고 곧 수백 명을 모병해 가지고 급히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다. 이때에 송운대사의 스승인 휴정(休靜)은 방총제도승(方總諸道僧)에 임명되어 있었으나 늙었으므로 사퇴하고 사명대사를 천거하여 자기의 대를 이어서 드디어 유성룡(柳成龍)을 따라 명나라 장수와 협동하여 평양 적을 파하고 도원수 권율(權慄)을 따라 영남에 내려가 수차 적을 참획(斬獲)하였으므로 임금께서 감탄하시어 당상관을 제수하시고 유총(劉總)의 병정을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왜영(倭營)에 들어가 가등청정(加藤淸正)을 회유하였는데 세 번 왕복하여 그 요령을 얻은 것이 많다. 가등청정이 조선에 보배가 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으니 네 머리가 바로 그것이다 하니 청정의 낯빛이 창백(蒼白)했다 한다. 대사가 돌아오자 임금이 내당에 불러 정탐한 왜적의 정세를 낱낱이 묻고 곧 전교(傳敎)하기를 옛날에 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는 모두 산인(山人)으로써 국가에 공훈이 많더니 대사도 만일 머리를 기르고 속인이 된다면 백리의 땅과 삼군(三軍)의 명을 무엇이든지 맡기리라 하셨으나 대사는 감히 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 뜻을 굽힐 수 없으므로 특히 갑옷과 무기를 하사하여 남은 적을 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또 성을 쌓고 한편으로는 군량미와 병기 등을 굳게 보완하고 곧 인수(印綬)를 올려 나이가 많으므로 쉬기를 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정유년에 왜적이 다시 침입함에 대사는 명나라에서 새로 들어온 마유(麻劉)와 유정(惟政)을 따라 갖은 포악을 해온 왜적을 평정하였다. 임금께서는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하였다. 신축년에 또 부산산성을 쌓고 갑진년에는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니 모든 왜놈이 서로 돌아보고 놀래며 두려워하였다. 오직 삼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남녀 삼천 수백 명을 데리고 와서 임금께 복명하니 임금께서 칭찬하시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리고 말과 옷감 등을 내리어 포장(襃獎)하였다. 그 후 대사는 나이가 많으므로 사직하고 치악산(雉嶽山)과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경술년 가을에 별세하였으니 세수 67세요 법랍은 57세이다. 장사하던 날 저녁에 사리 한 과를 얻어 석종(石鐘)에 간직하고 부도를 세웠다.
대사는 풍천 임씨이며 아버지 수성이 달성서씨에게 장가드시어 가정 갑진년에 대사를 낳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차차 자라 글을 읽다 홀연히 깨닫고 황악산(黃嶽山)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자는 이환(罹患)이며. 재주가 일찍부터 뛰어나니 소재(蘇齋), 사암(思菴), 고봉(高峯), 제봉(霽峰)같은 여러 높은 사람들과도 잘 알게 되고 또 시인(詩人) 최가운(崔嘉運), 허미숙(許美淑), 임자순(林子順), 이익지(李益之)등과도 시로써 놀게 되는데 시를 주고받고 하는 것이 훌륭하였다. 사명집(四溟集)이 있어서 세상에 간행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가 대사의 한 찌꺼기만 남은 것이며 진실한 것은 볼 수 없어 정녕 말할 것이 못된다.
오직 품기(稟氣)가 호일(豪逸)하고 사리에 달관하는 식견이 있고 지혜에 밝았다. 불교에 쫓았는데 그 교(敎)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세상에 나와서 난리를 그치게 할 뜻을 품었으므로 인륜을 떠났으나 나라를 지킬 성심이 돈독하여 적의 세력이 조수(潮水)와 같이 밀려들어 온 나라가 어지러운 때 명나라 장수들을 맞이하되 능히 막지 못한 것을 한마디 말로서 뭇 왜(倭)를 굴복시키고 한자의 칼로서 뛰어난 공훈을 세우니 공(空)을 말하고 환(幻)을 말하는 한 중(禪)에 비할 바 아니다.
임금께서도 옛날의 영걸(英傑)에 비교하여 그 포부(抱負)가 보통이 아닌 것을 잘 알 수 있으니 어찌 한 시대의 의부(毅夫)가 되고 한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영남 밀양 표충사(表忠祠)에서 사명대사를 향사하는데 휴정대사는 처음에 난을 감당한 공이요. 영규(靈圭)대사는 적을 섬멸한 공이 현저하고 또 순절(殉節)하였으므로 대사와 함께 향사한다.
숙종대왕 때 명령을 내리어 제수를 관(官)에서 주었고 지금 임금께서 또 명하여 복호(復號)를 주니 이것은 아름다운 풍속을 후세에 권장하는 까닭이다. 대사는 일찍이 수염을 깍지 아니하고 그 길이가 띠(帶)에까지 이르니 또한 훌륭하였다. 지금 유상(遺像)이 표충사(表忠祠) 영당에 있다.
내가 본래 스님에게 문자를 지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글을 지어 달라는 청이 오더라도 거절하였으나 오직 대사의 사적은 특히 훌륭하고 뛰어났으므로 참아 의례상으로 다른 것과 같이 물리치지 않고 드디어 새기게 되니 그 말에 이르기를 사람에게 오륜(五倫)이 있으니 첫째는 군신(君臣)이다. 전쟁에 나아가 의를 위해 분기하니 나라는 있고 몸은 없었다. 이것이 정리(正理)요 명교(名敎)를 따르는 바이로다.
범서(梵書)를 읽고 바릿대를 가지면 부처이요 사람은 아니다. 홀로 절만 지키고 불경만 읽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세상의 위란(危亂)을 보고 어찌 가슴 속에만 신음할 것인가. 거룩하다 송운대사(松雲大師)의 행동은 환(幻)이요 마음은 진(眞)이다. 수염이 무릎에 이르니 그 정신이 더욱 빛났다. 그 본뜻을 생각하니 수행자는 의관(衣冠)에 만족함이 아니로다. 임진왜란이 졸지에 일어났음에 난리를 밝히겠다. 맹세하고 군사를 모으니 무리를 뽑으니 군사의 규율이 새로워졌다. 유점사(楡岾寺)에서 중생을 구제하니 감화가 왜적에도 미쳐서 아홉 고을이 편안 하니 사람들을 고루 살린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먼저 하기를 사양하고 임금에게 알리더라. 군사지낸 대를 생각해보니 평양(平壤)과 정진(鼎津)이다. 로획(鹵獲)이 곱이나 많으니 비단과 은이 융숭하였다. 부산 적영에 세 번이나 갔다 올 때는 정성을 들여 힘을 다하였고 보배를 말할 때는 그 말이 장하였으니 기운이 가을하늘을 덮었다. 혀로서 칼날을 대로하니 멀리 강한 이웃이 항복하였다. 칠년 전쟁에 공이 백성에게 있었도다. 임금이 갸륵하게 생각하고 교서를 내려 순순히 이르기를 옛날 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는 그 공훈을 기린에 비함직하니 너도 능히 뜻을 굽혀 속세에 나와 나를 도운다면 백리의 땅과 삼군을 맡기겠다. 하였으나 스님은 절하고 이마 숙이고 감히 할 수 없나이다. 신은 늙어서 무능하오니 바라옵건대 인자하심을 드리우시어 다만 산 속에 들어가 잔나비와 새, 짐승과 서로 친하게 해주시면 이것이 신의 본뜻이라고 지성으로 아뢰고 편안히 돌아와 치악산(雉嶽山)에 들어갔다.
은혜와 상을 거듭 내리니 표절(表節)이 순수한데 호광(毫光)이 갑자기 살아지므로 법운(法運)이 마침내 기울어졌다. 탑묘(塔廟)는 공중에 솟았고 현주(玄珠)는 진귀함을 보았다. 밀양 무안에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천추에 길이 편안할 것이다. 유상(遺像)이 사당(祠堂)에 있으니 상쾌한 기운이 고요히 서렸도다. 오직 이와 같이 포장(襃獎)하는 것은 대개 제사 받들기를 신칙(愼飭)하여 이전과 같이 하지 아니하니 그 가르침이 이에 인(因)함이요, 세분의 대사(大師)를 함께 향사(享祀)하니 서로가 주빈(主賓)되게 함이로다. 공에 보답하고 의열(義烈)을 들어냄이 깊이 후세에 미치게 하였다. 내가 그 일을 쓰고 정민(貞珉)에 새김은 스님들로 하여금 스승의 의리를 따르게 함이니 공허(空虛)한 적막 속에 빠지지 말고 스승을 따라 환난(患難)을 구제할 것이다. 조선 영조 18년(1742년) 10월에 세우다
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 拓本
이 표충비의 뒷면은 사명대사의 행장(行狀)이 기록되어 있고 측면에는 기허(騎虛)대사의 내용과 표충사에 관한 내력이 각자(刻字)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조선후기의 문신 영추부사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이 지었으며 글씨는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金鎭商 1684~1755) 그리고 비문의 제목인 전서(篆書)는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썼다. 비문의 내용은 표충사의 내력과 서산대사의 행적, 사명대사의 행적, 그리고 사명대사가 임진왜란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켜서 전장에서 활약한 기록과 적장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을 다룬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에는 선조(宣祖)의 명을 받아서 일본으로 건너가 포로 300여명을 환국시킨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서산대사의 비명의 전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西山大師碑銘
서산대사비명
有明朝鮮國賜紫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淸虛休靜大師碑銘幷序
유명조선국사자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서산청허휴정대사비명병서
嘉善大夫戶曹參判李雨臣 撰
가선대부호조참판리우신 찬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尹得和 書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윤득화 서
通政大夫吏曹參議知製敎曺命敎 篆
통정대부리조참의지제교조명교 전
粤在萬曆壬辰島夷犯京 宣廟西幸西山大師休靜率其弟子惟政等倡義募兵樹中興大功 宣廟嘉其功命立表忠祠于嶺南之密陽並腏休靜惟政所以褒忠獎義也逮我 當宁十四年戊午以相臣之請有給復守護之命師之法裔南鵬改創祠于密之靈鷲山三綱洞奉二師遺像名其堂曰弘濟涉千里走京師訪余而屬文曰吾法祖西山之碑是文忠公月沙先生之文也厥后師之法派四世碑文皆出於公之門列樹於金剛之白華菴中儒釋之交至於四世者斯儘古之所無公乃文忠公之嫡孫今將竪石于師之祀記師功烈來請于公者意非偶然公於斯文惡可辭乎於戱余嘗讀先生之文知師之爲禪門中奇傑人而先生之文至今爀爀然照人耳目逾久而逾光則其於不朽師也奚待余言然余於鵬之言竊有所感于心不揆僭妄沘筆爲文曰師法名休靜字玄應自號淸虛子又稱西山俗姓完山崔氏名汝信外祖縣尹金禹父世昌箕子殿叅奉母金氏有異夢生師於庚辰三月三歲燈夕有一老翁來撫其頂曰此兒名以雲鶴仍忽不見幼與羣兒遊輒以佛事爲戱而及長風骨秀異頓悟禪法受經于靈觀大師鬀度于崇仁長老三十中禪科選至禪敎兩宗判事己而解其印入金剛作三夢詞曰主人夢說客客夢說主人今說二夢客亦是夢中人登香爐峯作詩曰萬國都城如垤蟻千家豪傑若醯鷄一窓明月淸虛枕無限松風韻不齊觀其發於辭者可稔其韜光匿影妙契於禪宗也己丑之獄爲妖僧無業誣引被逮供辭明剴宣廟卽命釋之取覽詩稿賜御畵墨竹命賦詩卽進絶句宣廟又賜御製而賞賚甚厚仍許還山壬辰之亂師仗劒赴行在宣廟敎曰世難至此爾爲出力弘濟耶師泣而拜命曰臣統率緇徒悉赴軍前殫效忠赤宣廟命爲八路十六道摠攝師分部沙門惟政領七百義僧起關東處英率一千起湖南師自率門徒及所募僧一千五百會于順安與天兵或先或後助援聲勢進戰于牧丹峯斬醎甚夥天兵乘勝擊之賊遂空城宵遁師乃迎鑾還都李都督如松送帖嘉獎曰爲國討賊誠忠貫日不勝敬仰又題詩贈之諸將莫不欽贊於是師請曰臣老不足當事軍旅之務屬之惟政處英卽還舊棲以守本分臣之願也宣廟嘉其志許之仍賜號曰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甲辰正月會弟子於妙香圓寂菴開道場說曇法題自家影幀曰八十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書訖脩然坐化時年八十五法臘六十五異香滿室所著文稿行于世師爲人法顔魁梧慧智聰悟在家事親至孝入山淸淨守法而忠君衛國之誠亦根天性遇患難乃能結主知於縲絏之中而至于國難倡起義旅羽翼王師收復三京氛祲載靖便卽納印飄然一衲遂返舊寺身雲心月復照於金沙淨界倬倬英風有足以䟪頽俗而立懦頑求諸往牒無與匹休明之廣孝齊之秉忠名雖義釋志在功利心跡不明亦奚足論也嗚呼當今之世開僧聞釋抱奇俊之才而淪於異敎甘自棄於虛無寂滅之中者凡幾人哉苟能當宗社岌嶪之時不縶其法而自勵大義倬然所樹立如師之爲則其有補於邦國將如何而又何以異敎少之哉師之示寂于今數百載而朝廷之特軫表異之典者亦所以樹風聲而激人心也南鵬勉乎哉師之文章造詣傳鉢法派詳載文忠公所撰碑文中故只叙其生卒出處始終倡義靖亂顚末如右銘曰巖瀆毓精異人挺形 仙婆告夢神翁錫名 字雖娿胎性則佛英 神秀氣淑髓綠骨靑 金鎞放光玉拂奏靈 道悟那羅理感死生 遂登法席摩尼照晶 無妄縲絏詩達天庭 恩隆御畵榮耀千齡 口呪梵音志在葵傾 逮國屯步先唱義聲 登壇誓衆雲集其兵 羽翼天戈掃彼穢腥 鼓勇迎鑾復我王京 忠義炳日華夷皆驚 功成納印歸錫雲扃 曇雲生鉢法月在甁 三夢舊偈玄契叮嚀 人間榮辱幻如夢醒 舍珠靈骨寶塔崢嶸 太古法派不滅光明 靈鷲立祠表揚忠貞 一軆同祭師弟共享 功紀麟臺道尊龍堂 一片貞珉万代留芳相位 領議政淸沙金公在魯 左議政藏密宋公寅明 右議政海村趙公顯命判位 吏曹判書 趙公尙絅 戶曹判書 尹公陽來 禮曹判書 尹公淳 兵曹判書 朴公文秀 刑曹判書 金公始炯 工曹判書 朴公師洙 漢城判尹 閔公應洙」本道 觀察使 李公箕鎭 觀察使 趙公明謙 觀察使 鄭公益河 觀察使 沈公聖希 觀察使 金公尙星」本府 府使任公守迪 府使尹公愗敎 府使李公玄輔」士林 生員孫碩寬 學生朴世矩 幼學李宜龍 學生申命胤 生員曺夏瑋 幼學成德周 幼學申應岳」宗匠 淸運 若垣 雷震 杜惠 萬薰 定慧 宣定 秀眼 軆淨 宏活 璽封 日暎 海源 最栢」有司 鶴林 禧有 信惠 淸印 明學」禪匠 一宗 震機 朗聰 眞淨 快善」行有司 惠文 廣惠 崔萬昌 金麗昌」守禦 宋時聖 金昌獜 姜後尙 丁就道 黃海澄 嚴世得」禮曹 嚴漢鵬 高世瑜 文重郁」本司 道內都摠攝海淑 北漢都摠攝性能 南漢都摠攝文旭 前摠攝翠眼 前僧統最日 海能」本府 權漢章 金龍孫 金有享」本營 中軍瑞胤 中軍垣梅」本道前公員 贊和 能玉 世照 順基 時載文」事判公員 前摠攝竺詮 義玄 垣珠」僧孫 一行 快印 處澄 處華 秀玄 一還 崇遠」本境內 慶州鎭 彩遠 義根 大邱鎭 順海 學輝 尙州鎭 寬機 性輝 最演 安東鎭 晋州鎭 哲雄 摠日 金海鎭 玄哲 淸眼 湖南僧統 楚文 星州鎭 宗益 錦日 善山鎭 太英 彦聰 東萊鎭 管晶 眞悟 漆谷鎭」幹善 靈印 智性 覺信 貴悅 熙哲 根悟 一燁 雙洽 歸淑 旣澄 印遠 善印 孟洽 碩眼 信嚴 裕卞 萬善 碩岑 坐石 太性 朗伯 世弘 楚印 淸現 俊卞 快淑 日珠 碩天 湫鴈 曳運」本院 僧統最心 和尙呂華 書記敏漢 海寬」禪傳齋 圓俊 允言 致和 希性」敎傳齋 尙玄 希律 順華 處俊 世弘 了岑」神丹 金得海芳憲 姜淡沙里 徐戒昌 基主崔俊種 杜有元」剞劂 歸允 國行 宏悅 管淸 吳漢伯 張瑞權 道淳 怡惠 世鵬 管海 漢楚」浮石 碑石都監前摠攝楚玧 物財都監前僧統裕察 典供物財都監 處寬 行有司兼都書記善文 監役國坦 裕洽 鶴益」典穀 演性 建祠 南鵬 有司 漢琦 宗正 大愚 主管演初書」齋任」
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사(賜) 국일도 대선사 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 서산(西山) 청허당(淸虛堂) 휴정대사(休靜大師) 비명(碑銘) - 병서(幷序)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우신(李雨臣)은 비문(碑文)을 짓고,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윤득화(尹得和)는 글씨를 쓰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 지제교(吏曹參議知製敎) 조명교(曺命敎)는 전액(篆額)을 하다.
지난 만력(萬曆)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섬의 오랑캐들이 도성(都城)을 침범하자 선묘(宣廟)는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그의 제자 유정(惟政) 등을 거느리고 창의(倡義)해 승병(僧兵)을 모집하고 국세(國勢)를 중흥하여 큰 공로를 세웠다. 이에 선조가 그의 공로를 가상하여 여겨 영남(嶺南) 밀양(密陽)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우고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을 함께 배향(配享)하라고 명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의 충의(忠義)에 대해 표창(表彰)하고 장려(獎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금상(今上)께서 즉위(卽位)하신 지 14년째인 무오년(영조14, 1738년)에 상신(相臣)의 청으로 인하여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전답(田畓)을 주어 수호(守護)하도록 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다. 대사의 법통(法統)을 이어 받은 남붕(南鵬)이 밀양의 영축산(靈鷲山) 삼강동(三綱洞)에 사우(祠宇)를 고쳐 새로 짓고는 두 대사가 남겨진 초상(肖像)을 봉안(奉安)한 뒤 그 당호(堂號)를 ‘홍제(弘濟)’라고 명명(命名)하였다.
그리고 천 리(里)되는 길을 헤치고 도성으로 달려와 나를 방문하여 글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법조(法祖) 서산 대사의 비문(碑文)은 문충공(文忠公) 월사선생(月沙先生)의 글입니다. 그 뒤 대사의 법파(法派) 4대(代)의 비문은 모두 공의 문중(門中)에서 나와 금강산(金剛山)의 백화암(百和菴) 안에 세워졌습니다. 유불(儒彿)의 교류가 4대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공은 바로 문충공의 적손(嫡孫)으로서, 지금 대사의 사당(祠堂)에 비석을 세워 대사의 공렬(功烈)을 제사하기 위해 공에게 와서 비문을 부탁하는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니니, 공이 이 비문을 짓는 일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 내가 일찍이 월사 선생의 글을 읽고서 대사가 선문(禪門)에서 걸출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의 문장은 지금까지도 밝게 빛나 사람의 귀와 눈으로 전해져 오래되면 될수록 더욱 빛이 나니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대사의 공로에 대해 어찌 내가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남붕(南鵬)의 말을 듣고 가만히 마음에 감동한 바가 있어서 분수에 넘치고 망령된 일임을 헤아리지 않고 붓을 적셔 비문을 지었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며, 자호(自號)는 청허자(淸虛子)라 하고 또 서산(西山)이라고도 불린다. 속세(俗世)의 성씨(姓氏)는 완산최씨(完山崔氏)이고, 이름은 여신(汝信)이다. 외조부(外祖父)는 현윤(縣尹)을 지낸 김우(金禹)이고, 아버지 최세창(崔世昌)은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을 지냈다. 어머니 김씨(金氏)가 기이한 꿈을 꾸고 경진년(중종 15, 1520년) 3월에 대사를 낳았다. 3세였던 사월 초파일 저녁에 어떤 늙은이 하나가 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하라.”하고는, 바로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를 않았다. 어려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에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일로써 놀이를 삼았다. 장성하여서는 풍채와 골격이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빼어났고 선법(禪法)을 깨달아 알았다. 영관대사(靈觀大師)에게서 불경(佛經)을 배웠고 숭인장로(崇仁長老)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30세에 선과(禪科)에 급제(及第)한 뒤에 벼슬이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이르렀다. 이윽고 벼슬을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몽사(三夢詞)’를 지어 말하기를,
主人夢說客 주인은 나그네에게 자기의 꿈 이야기하고,
客夢說主人 나그네는 주인에게 자기의 꿈을 이야기하네.
今說二夢客 지금 두 꿈 서로 이야기하는 나그네
亦是夢中人 이 또한 꿈속의 사람이라네. 라고 하였다.
그리고 향로봉(香爐峯)에 올라가 지은 시(詩)에서 말하기를,
萬國都城如垤蟻 만국(萬國)의 도성(都城)은 개미집 같고
千家豪傑若醯鷄 천가(千家)의 호걸(豪傑)은 초파리와 같도다.
一窓明月淸虛枕 창문 밖 밝은 달은 나의 베개 비추는데
無限松風韻不齊 끝없는 솔바람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도 하네. 라고 하였다.
그 시의 내용을 보면 빛을 감추고 종적(蹤迹)을 숨진 채 선종에 대해 오묘하게 깨달았음을 익히 알 수가 있다.
기축년(선조 22, 1589년)의 옥사(獄事)에서 요승(妖僧) 무업(無業)의 무고(誣告)로 인하여 투옥(投獄)되었는데,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즉시 그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대사가 지은 시를 가져다 보고 손수 그린 묵죽(墨竹)을 하사(下賜)하고는 시를 지어 바칠 것을 명하였다. 대사가 그 자리에서 절구(絶句)를 지어 바치니 선조도 또한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하사하고는 매우 후하게 상을 내리고 이어서 산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참고(參考) 서산대사와 선조임그므이 주고받은 시
서산대사(西山大師)
瀟湘一枝竹 소상(瀟湘)의 한 대나무 가지,
聖主筆端生 성군의 붓 끝에서 나왔음이로다.
山僧香燒處 산승이 향불 사루는 처소에
葉葉大秋聲 잎사귀에서 가을의 소리가 들린다.
선조대왕(宣祖大王)
葉自毫端出 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根非地面生 뿌리도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月來無見影 달이 비쳐도 그림자가 없고
風動不聞聲 바람이 불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음이로다.
임진년의 난리 때에 대사는 무장(武裝)을 하고 선조가 피난(避難)을 가 있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선조가 하교하기를, “세상의 난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대가 필요한 힘을 내어 어지러운 세상을 크게 구제하려는 것인가?”라고 하니, 대사가 눈물을 흘리며 임금의 말씀에 절을 하고 말하기를, “신(臣)은 승도(僧徒)를 통솔하여 군부(軍府)로 급히 달려가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팔로십육도총섭(八路十六道摠攝)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사문(沙門)을 나누어 유정은 700명의 의승(義僧)을 거느리고 관동(關東)에서 기병(起兵)하게 하였고, 처영(處英)은 1,000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호남(湖南)에서 기병하게 하였으며, 대사는 스스로 문도(門徒)와 모집한 승려 1,500명을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모여 명(明) 나라의 군사와 함께 혹은 선봉(先鋒)에 서기도 하고 혹은 후방에서 서기도 하면서 지원하여 위세(威勢)를 떨쳤다. 모란봉(牧丹峯)의 전투에 나가 싸워서 머리를 베어 죽인 왜적(倭賊)들이 아주 많았다. 명나라 군사들이 승기(勝機)를 틈타 왜적을 치니 적들이 마침내 성(城)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였다. 대사는 바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도부도독(都孚都督) 이여송(李如松)이 첩문(帖文)을 보내 칭찬하고 장려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왜적을 토벌하여 충성심이 해를 꿰뚫으니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다.라고 하고, 또 시를 지어 주니 우리나라로 원정(遠征) 온 중국의 장수들이 모두 흠앙(欽仰)하였다.
이에 대사가 청하기를, “신은 늙었으므로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 군대의 사무는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부탁하고서 곧바로 예전에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서 본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신(臣)이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시고, 이어서 ‘국일도대선사선교 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갑진년(선조 37, 1604년) 정월, 묘향산(妙香山) 원적암(圓寂庵)에 제자를 모아 놓고 도량(道場)을 둘러본 뒤 설법을 마쳤다. 그리고 자신의 영정(影幀)에다가 시를 지어말하기를
八十年前渠是我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고
쓰기를 마친 뒤, 초연하게 앉은 채로 입적(入寂)하였다. 이때의 나이가 85세요, 법랍(法臘)은 65세였다. 그때 기이한 향기가 온 방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대사가 저술한 문집(文集)은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대사의 사람 됨됨이를 보면 얼굴은 훤걸(喧傑)찼으며 지혜는 깨달음의 경지를 얻었다. 집에 있었을 때에는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입산(入山)해서는 나쁜 짓으로 지은 허물이나 번뇌의 더러움에서 벗어나 깨끗함으로 불법(佛法)을 지켰다. 그리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정성도 타고난 본성(本性)이었다. 무업에게 무고를 당하는 환란을 만났지만 감옥에 갇혀있는 가운데에서도 선조의 알아주는 은덕(恩德)을 입었다.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서는 의병을 일으켜서 나라의 군대를 도와 삼경(三京)을 수복(收復)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자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초연히 승복(僧服)을 입고 마침내 예전에 지내던 절로 돌아왔다. 대사의 몸과 마음은 구름과 달처럼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웠으며, 다시 선정(禪定)을 닦아 진실무착(眞實無着)하여 번뇌(煩惱)의 굴레를 벗어난 정토(淨土)를 관조(觀照)하였다. 그리고 위대한 영웅의 풍도(風度)는 무너진 풍속을 깨트리고 나약(懦弱)한 자와 완악(頑惡)한 자를 세우기에 충분하였으니, 지난 시대에서 찾아보아도 더불어 대사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를 밝혀서 효도를 넓히고 이를 가지런히 하여 충성을 구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의승(義僧)이었으나 뜻은 공리(功利)에 있었다. 그러니 마음과 자취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또한 어찌 따질 것이 있겠는가?
아! 지금 세상에 모든 승려를 통틀어보아도 기이하고 준걸(俊傑)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교에 몸담고서 기꺼이 허무적멸(虛無寂滅) 속에서 자포자기(自暴自棄)하고 있는 자가 무릇 몇 사람이겠는가? 만약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위급한 상황을 당하여서 불교의 계율(戒律)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대의(大義)에 힘써서 우뚝하게 대사가 했던 것처럼 공로를 수립한다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장차 어떠하겠으며, 또 이교(異敎)라고해서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대사가 입적한 지 이제 수백 년이 되어 조정(朝廷)이 특별히 표창하는 은전(恩典)을 내리는 것은 풍교(風敎)를 수립하고 인심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니, 남붕(南鵬)스님은 힘쓸지어다.
대사의 문장(文章), 학문의 경지(境地), 의발(衣鉢)의 전수(傳授), 법파(法派)는 문충공이 지은 비문 안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생졸(生卒)과 출처(出處)의 시종(始終), 의병을 일으켜서 난리를 평정한 전말(顚末)에 대해서만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와 같이 명(銘)한다.
巖瀆毓精異人挺形 仙婆告夢神翁錫名 字雖娿胎性則佛英 神秀氣淑髓綠骨靑
암독육정이인정형 선파고몽신옹석명 자수아태성칙불영 신수기숙수녹골청
산천(山川)의 정기(精氣)를 받아 남과 달리 모습 빼어났네.
신선 할미 꿈에서 점지(點指)하고 신비한 노인 이름을 지어주었네.
아리따운 몸에 잉태(孕胎)하였으나 불가(佛家)의 영명(英明)한 성품 지녔네.
정신은 빼어나고 기운은 맑으며 기골(氣骨)이 준수(俊秀)하였네.
金鎞放光玉拂奏靈 道悟那羅理感死生 遂登法席摩尼照晶 無妄縲絏詩達天庭
김비방광옥불주령 도오나라리감사생 수등법석마니조정 무망류설시달천정
금 빗(金篦)으로 광명을 내고 옥 먼지떨이(玉拂)로 신령(神靈)을 모았네.
나라(那羅)의 도리를 깨달았고 사생(死生)의 이치를 느끼었네.
마침내 법석(法席)에 오르니 마니주(摩尼珠)가 중생(衆生)을 비추었네.
뜻밖에 감옥에 갇혔으나 대사의 시(詩) 성상(聖上)께 진달(進達)되었네.
恩隆御畵榮耀千齡 口呪梵音志在葵傾 逮國屯步先唱義聲 登壇誓衆雲集其兵
은륭어화영요천령 구주범음지재규경 체국둔보선창의성 등단서중운집기병
성상께서 손수 그린 그림 내려주는 은전을 입으니 영광이 천추에 빛나네.
입으로는 불경(佛經)을 외우지만 뜻은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데 있었네.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미치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네.
단(壇)에 올라가서 대중(大衆)에게 맹세하니 병사들 구름처럼 모였네.
羽翼天戈掃彼穢腥 鼓勇迎鑾復我王京 忠義炳日華夷皆驚 功成納印歸錫雲扃
우익천과소피예성 고용영란복아왕경 충의병일화이개경 공성납인귀석운경
명나라의 군대 도와 저 더러운 왜적을 소탕하였네.
용기를 북돋아 어가(御駕)를 맞이하여 우리 수도(首都)로 돌아왔네.
충의(忠義)가 해처럼 빛나니 중국과 오랑캐 모두 놀랐네.
공(功)을 이룬 뒤 벼슬을 버리고 구름 낀 산사(山寺)로 돌아왔네.
曇雲生鉢法月在甁 三夢舊偈玄契叮嚀 人間榮辱幻如夢醒 舍珠靈骨寶塔崢嶸
담운생발법월재병 삼몽구게현계정녕 인간영욕환여몽성 사주령골보탑쟁영
담운(曇雲)은 바리(鉢)에서 생기고 법월(法月)은 병 속에 있네.
삼몽사(三夢詞) 지어 읊은 옛날의 게송(偈頌) 또한 오래도록 빛날 만하네.
인간 세상의 영화(榮華)와 치욕(恥辱)은 꿈같은 환상이라는 것 알았네.
사리(舍利) 구슬 신령하고 부도(浮屠) 탑 우뚝 솟아있네.
太古法派不滅光明 靈鷲立祠表揚忠貞 一軆同祭師弟共享 功紀麟臺道尊龍堂
태고법파불멸광명 영축립사표양충정 일체동제사제공향 공기린대도존룡당
태고보우의 법맥(法脈)과 광명(光明)이 사라지지 않았네.
영축산에 사당 세워 충정(忠貞)을 드러내었네.
일체 같이 제사하니 스승과 제자 함께 흠향하네.
공(功)은 공신각(功臣閣)에 기록되고 도(道)는 불당(佛堂)에서 존숭되었네.
一片貞珉万代留芳
일편정민만대류방
한 조각 곧은 돌에 만대(萬代)토록 아름다운 이름 남기리라.
▣ 상위(相位)
領議政 淸沙 金公在魯. 左議政 藏密 宋公寅明. 右議政 海村 趙公顯命
영의정 청사 김공재노. 좌의정 장밀 宋公寅明. 우의정 해촌 조공현명
▣ 판위(判位)
吏曹判書 趙公尙絅. 戶曹判書 尹公陽來. 禮曹判書 尹公淳. 兵曹判書 朴公文秀
이조판서 조공상경. 호조판서 윤공양래. 례조판서 윤공순. 병조판서 박공문수
刑曹判書 金公始炯. 工曹判書 朴公師洙. 漢城判尹 閔公應洙
형조판서 금공시형. 공조판서 박공사수. 한성판윤 민공응수
▣ 본도(本道)
觀察使 李公箕鎭. 觀察使 趙公明謙. 觀察使 鄭公益河. 觀察使 沈公聖希
관찰사 리공기진. 관찰사 조공명겸. 관찰사 정공익하. 관찰사 침공성희
觀察使 金公尙星
관찰사 금공상성
▣ 본부(本府)
府使 任公守迪, 府使 尹公愗敎, 府使 李公玄輔
부사 임공수적, 부사 윤공愗교, 부사 리공현보
▣ 사림(士林)
生員 孫碩寬. 學生 朴世矩. 幼學 李宜龍. 學生 申命胤 生員 曺夏瑋.
생원 손석관. 학생 박세구. 유학 리의룡. 학생 신명윤 생원 조하위.
幼學 成德周. 幼學 申應岳
유학 성덕주. 유학 신응악
▣ 종장(宗匠)
淸運 若垣 雷震 杜惠 萬薰 定慧 宣定 秀眼 軆淨 宏活 璽封 日暎 海源 最栢
청운 약원 뢰진 두혜 만훈 정혜 선정 수안 체정 굉활 새봉 일영 해원 최백
▣ 유사(有司)
鶴林 禧有 信惠 淸印 明學
학림 희유 신혜 청인 명학
▣ 선장(禪匠)
一宗 震機 朗聰 眞淨 快善
일종 진기 랑총 진정 쾌선
▣ 행유사(行有司)
惠文 廣惠 崔萬昌 金麗昌
혜文 광혜 최만창 김여창
▣ 수어(守禦)
宋時聖 金昌獜 姜後尙 丁就道 黃海澄 嚴世得
송시성 금창린 강후상 정취도 황해징 엄세득
▣ 예조(禮曹)
嚴漢鵬 高世瑜 文重郁
엄한붕 고세유 문중욱
▣ 본사(本司)
道內都摠攝 海淑. 北漢都摠攝 性能. 南漢都摠攝 文旭. 前摠攝 翠眼
도내도총섭 海淑. 북한도총섭 性能. 남한도총섭 문욱. 전총섭 취안
前僧統 最日 海能
전승통 최일 해능
▣ 본부(本府)
權漢章 金龍孫 金有享
권한장 김룡손 김유향
▣ 본영(本營)
中軍 瑞胤 中軍 垣梅
중군 서윤. 중군 원매
▣ 본도전공원(本道前公員)
贊和 能玉 世照 順基 時載文
찬화 능옥 세조 순기 시재문
▣ 사판공원(事判公員)
前摠攝 竺詮 義玄 垣珠
전총섭 축전 의현 원주
▣ 승손(僧孫)
一行 快印 處澄 處華 秀玄 一還 崇遠
일행 쾌인 처징 처화 수현 일환 숭원
▣ 본경내(本境內)
慶州鎭 彩遠 義根 大邱鎭 順海 學輝 尙州鎭 寬機 性輝 最演
경주진 채원 의근 대구진 순해 학휘 상주진 관기 성휘 최연
安東鎭 晋州鎭 哲雄 摠日 金海鎭 玄哲 淸眼 湖南僧統 楚文
안동진 晋州鎭 철웅 총일 김해진 현철 청안 호남승통 초문
星州鎭 宗益 錦日 善山鎭 太英 彦聰 東萊鎭 管晶 眞悟 漆谷鎭
성주진 종익 금일 선산진 태영 언총 동래진 관정 진오 칠곡진
▣ 간선(幹善)
靈印 智性 覺信 貴悅 熙哲 根悟 一燁 雙洽 歸淑 旣澄 印遠 善印 孟洽
령인 지성 각신 귀열 희철 근오 일엽 쌍흡 귀숙 기징 인원 선인 맹흡
碩眼 信嚴 裕卞 萬善 碩岑 坐石 太性 朗伯 世弘 楚印 淸現 俊卞 快淑
석안 신엄 유변 만선 석잠 좌석 태성 낭백 세홍 초인 청현 준변 쾌숙
日珠 碩天 湫鴈 曳運
일주 석천 추안 예운
▣ 본원(本院)
僧統最心 和尙呂華
승통최심 화상려화
▣ 서기(書記)
敏漢 海寬
민한 해관
▣ 선전재(禪傳齋)
圓俊 允言 致和 希性
원준 윤언 치화 희성
▣ 교전재(敎傳齋)
尙玄 希律 順華 處俊 世弘 了岑
상현 희률 순화 처준 세홍 료잠
▣ 신단(神丹)
金得海芳憲 姜淡沙里 徐戒昌 基主崔俊種 杜有元
김득해방헌 강담사리 서계창 기주최준종 두유원
▣ 기궐(剞劂)
歸允 國行 宏悅 管淸 吳漢伯 張瑞權 道淳 怡惠 世鵬 管海 漢楚
귀윤 국행 굉열 관청 오한백 장서권 도순 이혜 세붕 관해 한초
▣ 부석(浮石)
碑石都監前摠攝楚玧. 物財都監前僧統裕察. 典供物財都監處寬
비석도감전총섭초윤. 물재도감전승통유찰. 전공물재도감처관
行有司兼都書記善文. 監役 國坦 裕洽 鶴益
행유사겸도서기선문. 감역 국탄 유흡 학익
▣ 전곡(典穀)
演性 建祠 南鵬
연성 건사 남붕
▣ 유사(有司)
漢琦
한기
▣ 종정(宗正)
大愚
대우
▣ 주관(主管)
演初
연초
▣ 서(書)
齋任재임
[출처] 밀양 표충비각(表忠碑閣) (선재선재(善哉善哉)) |작성자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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